금융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자

[조선규의 Special Report] 담보의 웅덩이에서 신용의 강물로 한국 금융, 사람의 ‘가능성’을 평가해야

  • 부동산 웅덩이에 고인 자본의 역설 전체 대출의 60% 이상이 부동산 담보에 묶여 혁신 자금이 고갈된 ‘웅덩이 경제’를 타파하고, 자본이 생산적인 현장으로 흐르는 ‘리버 이코노미’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 변질된 혁신, 인터넷 은행의 배신 중금리 시장 개척이라는 사회적 계약을 맺고 출범한 인터넷 전문은행들이 손쉬운 주담대 영업에 안주하는 보신주의가 문제다. 반면 금융 당국의 엄격한 사후 관리와 라이센스 규제에 소홀히 한 것도 문제다.
  • 데이터가 증명하는 인간의 가능성 과거의 기록인 재무제표 대신 디지털 발자국(대안 데이터)을 통해 경영자의 성실성과 미래 가치를 정교하게 읽어내는 ‘휴머니즘 금융’이 대한민국 경제의 모세혈관을 살릴 유일한 해법이다.

기업은행조차 주택담보대출 실적에 매달려

한국에서 중소기업은 경제의 몸통인데, 금융에서는 여전히 변방입니다. 대한민국 경제의 모세혈관이라 할 수 있는 중소기업들은 오늘도 금융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2024년 기준 국내 전체 사업체 수의 99.%를 차지하고 전체 고용자 수의 81.3%를 떠받치고 있는 중소기업이, 정작 제도금융의 혜택으로부터는 구조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역설. 이것은 단순한 시장 실패가 아니라, 수십 년간 고착된 금융 관행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대기업에는 ‘신용’으로 자금의 문이 열립니다. 실적, 브랜드 가치, 시장지위가 곧 담보입니다. 그러나 중소기업 앞에서 금융은 예외 없이 ‘담보’라는 자물쇠를 채웁니다. 기획재정부가 대주주인 기업은행조차 현장 지점에서는 주택담보대출 실적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현장의 증언은, 우리 금융 시스템이 본래의 사명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표류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구조가 만들어내는 ‘기업 행동의 왜곡’입니다. 경영자가 사업으로 이익을 내면, 그 이익을 기술 개발이나 인재 확보에 재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대출 담보용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우선 쏟아붓습니다.

‘웅덩이 경제’를 끊어야 합니다

금융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동산을 사야 하고, 부동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또 자금이 묶이는 악순환. 이것이 자본주의의 선순환입니까? 아닙니다. 자본을 부동산이라는 ‘웅덩이’에 가두고, 혁신의 현장으로 흐르지 못하게 막는 ‘웅덩이 경제’의 전형입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가계·기업 합산 부동산 담보 대출 비중은 전체 대출의 약 62%에 달합니다. 선진 금융시장인 미국(41%)이나 독일(38%)과 비교할 때 이 수치는 명백한 이상 징후입니다. 자본이 생산적 자산이 아닌 비생산적 자산에 묶여 있다는 것, 이것이 대한민국 금융의 현주소입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신용평가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은 이미 우리 손 안에 있습니다.

구글의 데이터 과학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그의 저서 『누구나 다 거짓말을 한다』 에서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진실은 설문조사나 공식 기록이 아니라 디지털 발자국에 고스란히 새겨진다”고 역설했습니다. 금융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적인 재무제표는 과거의 기록일 뿐, 기업의 미래 생존력과 경영자의 역량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재무제표는 ‘어제의 초상화’이지, 내일의 설계도가 아닙니다.

이 맥락에서 인도에서 성공한 K-금융의 사례는 우리에게 명확한 지침을 제시합니다. 한국의 핀테크 기업들이 인도 시장에서 선보인 대안 데이터 기반 신용평가 모델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모바일 사용 패턴, 구독 앱의 성격, GPS 기반 생활 동선의 일관성, 소셜미디어 활동 방식, 청구서 납부 이력 등 비금융 데이터들이 기존 신용정보가 포착하지 못하는 성실성과 역량을 수치화합니다.

케냐의 모바일기반 신용서비스를 아세요?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권위 있는 경제 언론사 앱을 매일 아침 구독하고, 증권 앱을 통해 시장 흐름을 읽으며, 매일 일정한 시간대에 동일한 경로로 직장을 오가는 사람. 이 세 가지 ‘디지털 발자국’은 그 어떤 담보물보다 강력한 신용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빅브라더’ 식의 감시가 아닙니다. 개인의 동의 아래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 데이터로 자신의 신뢰를 증명하여 금융 접근권을 얻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 표현입니다.

미국의 FICO(Fair Isaac Corporation, 미국 신용등급 표준) 점수 체계를 대체하고 있는 VantageScore 4.0이나, 케냐의 M-Shwari 같은 모바일 기반 소액 신용 서비스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 방향성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케냐에서 은행 계좌조차 없던 이들이 모바일 데이터만으로 신용 등급을 부여받고, 소규모 사업을 일으키는 사례는 M-Shwari 모델의 보편적 타당성을 입증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기득권적 관행을 깨려는 의지와 게으름을 버리고 정교한 신용평가 모델 구축에 투자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모바일데이터를 이용한 신용평가 서비스의 예.
모바일데이터를 이용한 신용평가 서비스의 예.

인터넷 전문은행의 변질, 제도적 책임입니다.

우리는 이미 금융 혁신의 중요한 기회를 한 차례 가졌습니다. 2017년 카카오뱅크가, 2021년 토스뱅크가 출범할 당시, 정부와 국민이 공유한 기대는 분명했습니다. IT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존 시중은행이 기피하는 중금리 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하고, 제도금융의 사각지대에 놓인 중신용자와 소규모 사업자에게 합리적 금리로 자금을 공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혁신의 라이센스를 부여한 사회적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기대를 배신했습니다. 2023년 기준 카카오뱅크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전체 대출의 30%를 훌쩍 넘었고, 토스뱅크 역시 출범 초기의 중금리 대출 확대 기조를 점차 희석시키며 손쉬운 수익 모델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혁신의 기수여야 할 그들이, 기존 시중은행이 수십 년 전에 완성한 주담대 수익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물론 1차적으로는 금융기관 자신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책임은 라이센스를 허가한 당국에 있습니다.

진입 허가 당시의 사회적 계약으로 중금리 대출 비중 목표, 독자적 신용평가 알고리즘 개발 의무화, 중소기업 대출 확대 로드맵을 법적 구속력 있는 조건으로 명시하지 않은 채 원칙 선언에 그친 것은 정책적 직무 유기였습니다.

허가를 내준 이들, 그리고 지금 그 기관의 고문 혹은 사외이사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난 수년간 대한민국의 신용평가 모델은 단 1cm라도 전진했습니까?

이제라도 금융 당국은 명확한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첫째, 인터넷 전문은행의 중소기업 및 중신용자 대출 비중에 법적 하한선을 설정하고 이를 라이센스 갱신 심사의 핵심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둘째, 대안 데이터 활용 신용평가 모델의 개발·적용을 의무화하고, 그 성과를 주기적으로 공시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 중소기업 신용평가 전문기관을 육성하여 개별 금융기관이 공유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신용 인프라를 국가 차원에서 구축해야 합니다. 기술을 보유하고도 보신주의 영업에 안주하는 것은, 사회적 라이센스를 남용하는 행위입니다.

휴머니즘의 확장, 자본주의의 완성입니다.

자본주의의 본령은 자원이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곳으로 자유롭게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이 효율이 아니라 담보의 크기에 따라 배분될 때, 자본주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합니다.

중소기업 경영자가 가진 아이디어와 성실함이 데이터로 증명되고, 그 증명이 곧 자본으로 연결되는 시스템.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리버(River) 이코노미’의 모습입니다.

강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생산이 필요한 곳으로, 가치가 창출되는 곳으로 끊임없이 흐릅니다. 자본이 부동산이라는 갇힌 웅덩이를 벗어나 혁신의 현장, 기술의 현장, 사람의 현장으로 흐를 때, 우리 경제는 비로소 역동성을 회복할 것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반복적으로 지적해온 한국 경제의 이중구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생산성 격차, 금융 접근성의 양극화는 이 강물이 막혀 있는 한 결코 해소되지 않습니다.

결국 금융 혁신의 종착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기계적인 담보 설정이 아니라, 데이터를 통해 한 인간의 가능성과 진정성을 읽어내는 기술. 그것은 차가운 계산의 자본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휴머니즘으로 확장하는 일입니다.

금융의 본질은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아닙니다. 미래의 가치에 ‘신뢰’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그 신뢰가 담보가 아닌 실력과 성실함에서 나올 때, 금융은 비로소 자신의 사회적 소명을 다하게 됩니다.

정책 당국자들에게, 금융기관의 경영자들에게, 그리고 이 시스템 안에서 숨막혀 하는 수십만 중소기업인들에게 이 한 문장을 남깁니다. 담보는 과거를 봅니다. 신용은 미래를 봅니다.

대한민국 금융이 과거를 보는 관행에서 벗어나 미래를 볼 수 있는 역량을 갖출 때, 그리고 그 미래를 보는 눈이 데이터라는 객관적 언어로 벼려질 때, 우리 경제의 모세혈관은 제대로 뛰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칼럼을 영상으로 · 2:04 기업은행조차 주담대 압박? 대한민국 금융이 '부동산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면?
글쓴이

조선규 칼럼니스트

조선규는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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