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11세기 코르도바의 ‘평화와 공존’ 재현할까

[이근윤의 사우디, 중동이야기] 미국의 탈중동, 중동 평화의 공간 열려 UAE·사우디·이란, 공존 약속해 선의의 경쟁 코르도바, 3대종교 공존하며 큰 번영 ‘아브라함 가족의 집’도 완공...화해의 상징

지난 2월말 완공된 '아브라함 가족의 집'
지난 2월말 완공된 '아브라함 가족의 집'

10~11세기 ‘위대한 번영’ 코르도바 시대

중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고 있어 불안정하지만 화해와 평화 모드가 중동 전지역에 확산되고 있다. 중동 역사에서 평화는 영광의 문화적 토대였다.

11세기 이슬람 칼리파 제국의 수도 '코르도바' 상상도.
11세기 이슬람 칼리파 제국의 수도 ‘코르도바’ 상상도.

10~11세기 이슬람 칼리파 세계 제국의 수도는 스페인의 ‘코르도바’였다. 그곳은 경제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 ‘지구의 보석(Jewel of the Earth)’과 같았다. 코르도바에는 수만 개의 상점과 수천의 모스크, 목욕 시설이 있었고, 하천이 흐르고, 포장된 도로와 가로등이 있었으며, 40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칼리파의 도서관이 있었다(그리고 그 도서관은 코르도바에 있는 70개의 도서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와 안달루시아가 보여준 ‘관용’과 ‘문화적 교류’의 수준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코르도바의 사례가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나중에 기독교인이 재정복한 톨레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가 각각의 신학적 핵심 내용에서는 차이가 확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없이 공존할 수 있었으며, 각각의 종교가 규정하고 있는 삶의 형식을 고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파문/축출(Excommunication)이 아니라 생생한 소통(Communication)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이 아니라 문명의 대화(Dialogue of civilizations)가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한스큉, 이슬람:역사, 현재, 미래, 682~683p, 영어판에서 재번역)

평생을 종교간의 대화와 평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던 튀빙겐 대학의 석학 한스큉의 역작 ‘이슬람: 역사, 현재, 미래’에 나오는 중세 코르도바에 대한 묘사다. 1200페이지가 넘는 대작에서도 가히 가장 반짝이며, 가슴 뛰게 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메스키타’가 보여주는 관용과 교류

필자가 코르도바의 대표적인 건축물 ‘메스키타’를 방문했을 때, 한 때 이교도가 사용하던 건물을 기독교 성당으로 개조했다가, 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재건축하고, 또 다시 성당으로 돌아 온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장면에 절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건축물 안에 공존의 히스토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지금도 뭐라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스페인 코르도바 전경과 가운데 메스키타 회교 사원.
스페인 코르도바 전경과 가운데 메스키타 회교 사원.

코르도바에서 펼쳐진 이 역사적 장면이 감동을 주는 것은, 피로 얼룩진 코르도바 이전과 이후의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둔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숱한 충돌과 전쟁, 핍박과 축출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십자군 전쟁이나 콘스탄티노플 함락,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같은 세계사의 굵직한 장면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21세기 들어와 일어난 아프간 전쟁에서 23만명, 이라크 전쟁에서 15만명, 시리아 내전에서 38만명 등 지금까지 중동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의 사망자만 92만명에 달할 정도이고, 발생한 난민의 총 숫자가 20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중동은 끔찍한 대혼돈의 멀티버스라 할만하다.

그리고 최근 우리는 ‘세계의 화약고’와 같던 중동에서 군기 반장을 자처하고 나섰던 미국이 무려 7조 달러가 넘는 전쟁 경비를 지불하고도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마치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 나오는 베트남 전의 패전을 연상케 하는 헬리콥터 씬을 남기며 카불을 탈출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사우디 국가안보 책임자와 이란 국가안보 책임자(오른쪽)이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이를 주선한 중국의 왕이 공산당정치국 위원,
사우디 국가안보 책임자와 이란 국가안보 책임자(오른쪽)이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이를 주선한 중국의 왕이 공산당정치국 위원,

‘변화의 바람’ 거세게 불어

그렇게 탈(脫) 중동을 선언한 미국은 전통의 우방 사우디와는 인권 문제로 각을 세우더니, 1979년 호메이니 혁명 때 무려 3년간 미국 대사관의 인질을 붙잡고 있었던 악연으로 수십년간 ‘악의 축’으로 여기던 이란에는 호의적 제스처를 취하는 등 지난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며 중동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급기야 그 빈틈을 러시아의 푸틴과 중국의 시진핑이 파고들었다. 이들 국가는 터키, 사우디, 시리아, 이란 등 미국과 티격태격 중인 나라들과 권위주의 국가 연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 시진핑의 중재 하에 사우디와 이란 양국이 외교관계 복원을 선언하는 장면은, 미국이 사라진 중동에서 일어난 ‘초현실적인’ 외교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반면 이렇게 이슬람 세계의 양대 맹주들이 화해하는 분위기 속에서 가장 긴장할 수밖에 없는 국가인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가장 격렬한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가 극우 정당들과의 연정으로 당선된 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법원의 권한 축소 법제화를 실제로 시도했고,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이 연일 강력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미국의 압박에 일단 네타냐후가 한발 물러섰지만, 조만간 다시 법제화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스라엘 전역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반정부 시위.
최근 이스라엘 전역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반정부 시위.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진 법원은 지금까지 극우 정치 세력들의 여러 계획들을 무산시키면서 우익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진보적인 시민들에게는 최후의 보루와 같았던 법원이 지금까지 갖고 있던 권한을 잃어버리게 될 경우, 국회와 정부를 장악한 우파 정치인들의 근본주의적 정책을 막을 수단이 없어지는 것이다.

현재 집권세력이 추진 중인 법안이 통과될 경우 전세계에서 가장 리버럴하다는 평을 받아오던 이스라엘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전망이다. 당장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의 LGBT(다양한 성정체성) 인구들이 다양한 차별과 제제를 받게 될 것이고, 가뜩이나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압박을 받고 있는 무슬림 인구들은 심하게는 추방을 염려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스라엘 내 극우 정치 세력들의 입김이 외교로 번져갈 경우 중동은 또 다시 전쟁을 걱정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흘러갈 지도 모른다. 이란 핵시설 선제 타격을 주장할 정도로 과격한 정치색을 가진 이들이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완공된 ‘아브라함 가족의 집’

이런 혼돈의 와중에 그나마 반가운 소식은 아부다비에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화합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아브라함 가족의 집’이 완공되었다는 것이다. 3대 종교를 상징하는 세 개의 건물 중 기독교의 성당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이슬람의 모스크는 메카 방향으로, 유대교의 회당은 예루살렘 쪽을 각각 향하도록 했고, 화합과 평등의 의미로 각 예배 시설은 모두 같은 높이로 설계했다고 한다.

‘아브라함 가족의 집’ 프로젝트는 2019년 2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역사적인 아랍에미리트(UAE)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교황은 수니파 이슬람 신학의 총본산인 이집트 알아즈하르의 대이맘 셰이크 아흐메드 엘타예브와 ‘인간 박애 선언’에 서명하고 종교 간 화합과 선의, 평화를 촉구했다. 자예드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교황 집전 미사에는 무려 4000여명의 무슬림도 참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역대 교황 중 최초로 이슬람교 발상지인 아라비아 반도를 방문하면서 UAE 아부다비를 목적지로 선택한 것이나, ‘아브라함 가족의 집’이 들어서게 된 것 모두 아부다비 정부가 추구하는 개방과 포용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UAE는 2020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며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UAE는 내년 2월 첫 힌두교 사원까지 개관할 예정이다.

대결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온 중동의 역사에 개방과 포용을 표방하는 UAE의 행보가 단연 돋보인다. 이런 적극적인 행보를 반영한 것인지, 최근에 발표된 글로벌 소프트파워 랭킹에서 UAE가 5계단 상승하면서 사상 최초로 TOP 10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작년 12위에서 3단계 내려오며 15위로 TOP 10에서 좀 더 멀어졌다.

UAE 사우디가 주도하는 평화와 화해

한편 사우디는 국운을 건 초대형 프로젝트 네옴 신도시를 발표하며, UAE가 주도하던 중동의 플래그십 도시 타이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미래 도시에 전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모아 미래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엄청난 판돈을 베팅하겠다는 것이다.

네옴 시티의 성공을 위해서 사우디는 반드시 중동의 평화를 이뤄내야 한다. 결국 사우디의 그런 과감한 행보가 이번 이란과의 외교관계 복원을 이뤄냈고, 조만간 이스라엘과도 수교를 한다는 소문까지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극강의 수퍼파워 미국의 영향력이 강력하던 시절의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였지만, 미국이 탈중동을 선언하고 다극체제가 시작되자 곳곳에서 미래를 선점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부디 이런 시도들이 11세기 코르도바가 보여 주었던 놀라운 관용과 공존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랜 반목과 갈등의 역사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1세기의 코르도바가 되기 위해, 두바이, 테헤란, 이스탄불, 카이로, 그리고 네옴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 된다면 평화만이 아니라 11세기 코르도바가 누렸던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번영도 함께 가져오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글쓴이

이근윤 사우디 사업가 겸 칼럼니스트

필자인 이근윤은 서울대에서 환경과학을 전공했다. 한국렌탈 중동총괄 이사를 역임했고 현재는 켄렌탈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이메일 주소는 musc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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