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명령 이행 못해!” 의인 문형순
- 죽음의 광풍을 막아선 신념 제주 4·3이라는 비극의 한복판에서 광기에 취한 학살이 자행될 때, 문형순 경찰서장은 총살명령 지시서에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란 이유를 달아 수백 명의 양민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냈다.
- 영웅이 겪어야 했던 가혹한 세월 독립을 위해 만주벌판을 누볐던 독립운동가이자 참된 경찰이었던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영웅으로 대접받기는커녕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 사후에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묘비가 꺾이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비로소 국립묘지에 안장되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외로운 세월은 우리 역사의 뼈아픈 불명예다.
- 남은 후세의 시대적 책무와 다짐 이제 참전유공자로서의 영예를 찾았으나, 그가 헌신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름은 여전히 사료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를 독립운동가로 온전히 예우하는 것은 단순히 한 인물의 명예 회복을 넘어,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의인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우리 후세들의 의무다.
7년 7개월간 공식 사망자만 3만 명 넘어
‘제주4·3’은 길고도 잔혹했다. 비극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 사건은 미 군정기인 1947년 3월 1일에 일어났고, 이 참극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기까지는 무려 7년 7개월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6·25 전쟁이 끝나고 무장대의 세력이 사실상 궤멸하자, 1954년 9월 21일 신상묵 제주도경찰국장은 한라산의 전면 개방을 발표했다. 계엄령 이후 서슬 퍼렇게 이어지던 한라산 금족령(禁足令)이 마침내 해제된 순간이었다.
공식 정부 집계로 3만 명이 넘는 양민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이 억울한 죽음이었다. 군경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의 손에 수만 명이 스러졌고, ‘공비’나 ‘산사람’이라 불리던 무장대도 적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토록 참혹한 역사임에도 제주 4·3은 여전히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4·3사건법)에는 ‘제주4·3사건’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이 거대하고 참혹한 역사를 담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필자는 제주4.3의 핵심과 본질은 ‘수난과 항쟁’이라 생각한다. 저항의 불꽃은 짧았고 수난은 끝나지 않을 것같이 길었다. 필자는 도민들의 주체적인 외침을 기억하고자 이 글에서는 ‘항쟁’이라 부르고자 한다.
세 번의 시기에 걸친 대량 양민 학살
제주 4·3항쟁 기간 중 양민 학살이 집중되었던 시기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그 참혹함의 정도와 희생의 규모에 따라 순서를 매기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대규모 양민학살은 초토화 작전이 휘몰아친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의 기간이다.
1948년 10월, 송요찬 제9연대장은 “해안선에서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른바 ‘한라산 금족령’이었다. 이어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다.
4·3 희생자 전체의 70~80%가 불과 이 5개월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민간인 학살로는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했던 시기다.
두 번째로 규모가 컸던 희생은 6·25 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학살이 자행된 1950년 7월부터 8월 사이였다.
전쟁터가 아니었음에도 제주도에는 또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터지자, 과거 좌익활동 경력이 있거나 단순 미온 가담자, 심지어 4·3항쟁 당시 단순 귀순했던 양민들까지 “적에게 동조할 위험이 있다”라며 예비검속으로 잡아들였다.
군경 토벌대는 예비검속으로 붙잡아 둔 양민들을 법적 절차도 없이 먼 바다에 수장하거나,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 총살했다.
문형순 서장이 헌병대의 명령을 거부하며 성산포 주민들을 구해낸 때가 바로 이 시기다. 아울러 4·3항쟁과 관련해 대구, 부산, 전주, 대전 등의 교도소로 이송해 수감 중이던 제주도민 수천 명도 전쟁 발발 직후 집단 학살당해 행방불명됐다.
세 번째는 초기 강경 진압이 벌어진 1948년 5월부터 6월까지다. 1948년 4월 28일, 김익렬 제9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 사령관 사이에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한 ‘4·28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불과 사흘 만에 미 군정과 조병옥의 배후 조종으로 일어난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협상은 종잇조각이 되고 말았다.
미 군정은 온건파였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미 군정의 충실한 하수인이자 강경파인 박진경 중령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박진경 연대장은 “제주도민 30만 명을 다 죽여도 상관없다”라며 부임 한 달 만에 주민 6,000여 명을 무차별 연행했고, 이 과정에서 초기 희생자가 급증했다.
결국, 박진경 연대장은 미 군정 장관 딘 소장이 마련해 준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이튿날 새벽 그의 무모한 작전에 반대하던 부하들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역사학계는 만약 ‘4·28 평화협정’이 지켜졌다면 수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짙은 아쉬움을 던진다.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위 세 시기 중 첫 번째 ‘초토화 작전기’를 핵심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나아가 두 번째 비극인 ‘6·25 전쟁 직후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학살’까지 깊숙이 관통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명확한 글씨로 ‘부당함으로 불이행’
이 글의 주인공인 문형순 경찰서장은 이 세 번의 지옥 같은 시기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제주도에서의 그의 활동 시기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였다.
제주 4·3항쟁 당시 제주 관내 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배운 게 없어 경찰 법규조차 잘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불의와 싸우기 위해 법규를 일부러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방끈이 짧았을지는 몰라도 공직을 수행함에 부족하지 않은 정신과 학식의 소유자였다. 서슬 퍼런 ‘총살명령서’ 상단에 휘갈긴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란 여덟 글자가 이를 웅변한다.
그의 별명은 ‘문 도깨비’였다. 엄혹했던 당시의 상황임에도 경찰 조직 내에서 그만이 군부의 부당한 위압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제주4·3항쟁 와중에 그는 50대 중년이었다. 당시 그를 기억하는 동료들은 ‘그는 기운이 장사였고 배짱이 두둑했으며, 사내다운 멋이 흘러넘치던 사람’으로 그를 추억한다.

대한민국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시절 문시영(文時映)이라는 이름을 썼던 문형순은 1897년 1월 4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30년대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자치정부 ‘국민부’의 중앙호위대장으로 활동했으며,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기도 했다.
만주 일대에 흩어져 활동하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등 3개 독립운동단체가 합쳐서 만들어진 ‘국민부’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활동은 물론, 일제 밀정 처단, 군자금 모집, 독립군 모병 등 치열한 군사활동을 전개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 단신 월남했으나, 남으로 내려오는 자세한 과정은 알려진 게 없다. 문 서장과 동향이자 경찰 동료였던 전(前) 평안도민회장 전정택 씨는 “해방 직후 미 군정이 상해임시정부나 광복군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기에, 문 서장은 북을 거치지 않고 서울로 바로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 걸었던 길이었다.
문 서장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경찰에 발을 들여놓은 후 제주에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는 고향인 평안북도로 귀향했으나 공산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껴 월남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러한 그의 간략한 행적은 『독립운동사』,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 『한국독립사』 등 여러 사료에 편린으로 남아있다.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 총살을 집행하라”는 명령
문형순 서장은 성산포 서장으로 재직할 당시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글을 써 돌려보낸 그 상부의 명령이란 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보자. 당시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보낸 1950년 8월 30일자 총살 명령 공문에는 다음과 같은 잔인한 지시가 적혀 있었다.
“제주도에 계엄령 실시 후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 중에서 현재까지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 경찰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방첩대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의뢰함”
여기서 ‘예비검속’이란 국민연맹 가입자를 비롯해 소위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예방적 구금이었다. 제주도 내 예비검속은 제주·서귀포·모슬포·성산포 등 경찰서별로 진행되었다. 경찰은 예비검속자를 A, B, C, D 네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가장 ‘위험한 자’들이 D급이었다. 1950년 8월에 제주지역 주둔 군경은 예비검속자들을 대대적으로 집단 총살했다. 집단 총살을 당한 사람들은 주로 C급과 D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제주경찰서 관할에서는 두 차례의 참혹한 집단 학살이 있었다 첫 번째 학살은 1950년 8월 4일에 제주항에서 알몸 차림의 수감자 500여 명을 태운 배가 바다에 나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 배로 돌아왔다. 수장(水葬)이었다.
2차 학살은 1950년 8월 19일 밤부터 20일 새벽 사이에 벌어졌다. 수백 명의 수감자가 트럭에 실려 와 현재의 제주국제공항 부지인 ‘정드르’에서 총살된 후 집단 암매장되었다.
서귀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들의 비극은 1950년 7월 29에 일어났다. 서귀포 수용소에 갇혀있던 150여 명이 어디론가 끌려간 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남겨진 수감자 중 일부는 8월 12일에 제주도 경찰국으로 이송되었다가, 제주읍 수감자들과 함께 ‘정드르’에서 총살당했다.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자들은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와 한림지서 관할 어업조합 창고에 분산 구금되어 있었다. 이들은 1950년 8월 20일 새벽,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처형되었다. 모슬포 수감자들과 한림 수감자들은 약간 다른 위치에서 총살을 당했다. 유가족들이 시신이라도 거두려 했으나 군인들이 제지하여 수습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1956년에야 유족들은 겨우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문형순 소장이 부임했던 성상포만 무사
이 모든 경찰서가 광기에 휩쓸려 무고한 피를 흘릴 때, 오직 성산포경찰서만은 예외였다. 문형순 서장은 수감자들에 대한 집단 총살을 강요하는 해병대의 지시문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써 돌려보내며 총살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문형순은 C급(4명)과 D급(76명)으로 분류된 80명의 명단 중 단 6명만을 군에 인도했다. 서귀포경찰서로 이송된 이들 6명은 끝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 서장의 용기 덕분에 나머지 많은 성산포 도민들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광란의 예비검속 학살극은 1950년 9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되었고, 각 경찰서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생존자는 심사를 거쳐 모두 석방되었다.
또한, 문형순 서장은 성산포 경찰서로 옮기기 전의 근무처인 모슬포경찰서에서도 ‘자수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한 많은 주민을 살렸다는 증언이 있다. 1948년 말 ‘초토화 작전’의 학살극이 벌어지던 당시 ‘자수사건’이 잇따랐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무장대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말하며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란 협박이 뒤따랐다. 자수자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으나 토벌대는 이들을 용서하기는커녕 가차 없이 학살했다.
이때 모슬포서장이던 문형순이 다시 한번 방패를 자처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주민들을 때리거나 진술을 강요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나아가 서북청년단이 조서를 조작하지 못하도록 서청 대원들을 배제하고, 마을 서기에게 조서를 직접 작성하도록 조치했다.
덕분에 날조된 죄목을 벗은 100여 명의 주민은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 목숨을 건진 주민들이 그 고마움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아 모슬포 짐개동산에 추모비를 세웠다.

쓸쓸히 마감한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1950년대 초 성산포경찰서장에서 물러난 문형순 서장은 당시 김호겸 서귀포경찰서장의 권유로 경남경찰국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함안경찰서장으로 1년 동안 재직했다. 이후 다시 제주로 돌아와 경찰로 근무하다가 1953년 9월 15일 경찰 제복을 벗었다.
경찰을 그만둔 후 제주시 무근성 지역에서 경찰에게 쌀을 나눠주는 쌀 배급소에서 일을 맡아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그 후 현대극장의 전신인 대한극장에서 ‘기도’를 서는 등 잡일을 하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타계했을 때 그에게는 돌봐줄 유족도, 남겨진 재산도 단 한 푼 없었다. 그는 혼란을 틈타 온갖 악행으로 재물을 갈취하던 ‘서청’ 사람들 하고는 차원이 다른 영웅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당시 제주경찰국이 “독립운동가 출신의 전직 서장이 사망했다”고 중앙에 보고하자 정부로부터 소액의 하사금이 내려왔고, 여기에 평안도민회가 정성을 보태 건입동 공동묘지인 ‘황세왓’에 그를 겨우 묻었다.
그러나 비극은 사후에도 이어졌다. 어느 날 문 서장의 묘비가 누군가의 해머에 맞아 두 동강 난 채 발견된 것이다. 고의적인 훼손이 분명했다. 평안도민회는 고인의 시신과 묘비를 보호하기 위해 1976년 4월 5일, 평안도민회 공동묘지가 있던 현 제주대학교 자리로 묘를 옮겼다. 이후 대학이 들어서면서 다시 오등동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등, 그의 유해는 오랜 세월 편히 쉬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 갔다.
마침내 무심한 세월을 뚫고 2000년대 들어 그의 위대한 의업(義業)이 세간의 빛을 보기 시작했다. 무고한 도민의 목숨을 구한 경찰서장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그를 기리기 위한 국가적 명예회복이 본격화된 것이다.
경찰청은 2018년 문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고, 그해 11월 제주경찰청은 그의 추모 흉상을 건립했다. 이 흉상은 노형동 신청사로 옮겨져 엄격히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국민부 중앙호위대장 등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펼친 행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총 6차례에 걸쳐 독립유공자 서훈이 추진되었으나, 입증자료 미비 등의 이유로 번번이 보류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에 경찰청은 6·25전쟁 당시 지리산전투사령부 등에서 경찰관으로 참전한 이력에 착안하여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고, 마침내 국가보훈부로부터 참전유공자로 승인받는 결실을 보았다. 이 국가유공자 자격을 바탕으로 국립묘지 안장이 최종 승인되면서, 영웅 문형순은 마침내 영원한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로서 마지막 훈장을 달아드려야
2024년 5월 10일 국가보훈부와 경찰청은 유족이 없는 문 서장을 위해 국가가 직접 상주가 되어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수백 명의 삶을 구하고도 쓸쓸히 묻혀야 했던 문형순 서장의 유해는 국립제주호국원으로 정식 안장되어 마침내 국가와 도민의 품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일은 그에게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예를 찾아주는 일이다. 2006년 8월 전정택 제주지구 평안도민회장이 문형순 서장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으나, ‘입증자료 미비와 사후행적 불분명’으로 보류됐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에 2010년 4월 추가자료를 찾아내 재심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011년 3월에는 이대수 전 제주보훈처장이 추가로 발굴한 자료를 보내며 다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으나, ‘지금까지의 자료로는 더 이상의 재심사가 불가능하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현재까지 여섯 번의 신청에도 이러한 사정은 변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젊은 날 독립운동의 흔적은 저 멀리 만주벌판에 남겨져 있다. 월남 이후 제주에서 경찰업무를 수행했던 혈혈단신의 영웅은 청렴 공복의 삶을 살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할 심사자료가 미흡하다면, 이제는 국가보훈처가 나서서 그가 분투했던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해야 한다. 그것은 대한후예들의 의무이며, 영웅에 대한 국가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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