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파벨 트레챠코프 ①
[김희은의 울림 깊은 러시아 예술 이야기] “문화를 보존해야” 일념으로 전재산 털어 황제 폭정에도 2천여 러시아그림 컬렉션 미술관 설립...민중들이 무료로 볼 수 있게 빵까지 제공하며..끝내 국가에 헌납해
“문화는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사람들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한 나라의 미래는 이 문화를 어떻게 보존하고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트레차코프 미술관’을 설립한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차코프(1832∼1898)가 한 말이라고 한다. 트레차코프 미술관은 전 세계를 통틀어 자국의 그림을 걸어놓은 박물관 중 최대 규모다. 다시 말해 순수하게 러시아 예술품만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다.
러시아 미술을 지킨 ‘부자’ 트레차코프
러시아는 한마디로 예술 강국이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등을 통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만, 실제 러시아를 방문해 도시마다 자리잡고 있는 박물관을 보게 되면, 그 예술적 위용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러시아 그림은 물론, 세계 명화까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박물관이 도시마다 즐비해 시대별 미술사를 한눈에 꿸 수 있는 곳이 바로 러시아다.
모스크바에는 러시아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트레차코프 미술관’과 세계 명화가 소장되어 있는 ‘푸시킨 박물관’이 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러시아 박물관’과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있다. 이 나라에서 박물관 견학은 당연히 초중고 정규 교육 프로그램에 포함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예술 체험을 하도록 체계화되어 있다. 이같은 제도적, 환경적 시스템이 현재도 러시아를 예술 강국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황제의 권위를 능가한 트레차코프의 한마디
사실 이같은 예술적 환경은 수백 년의 역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지, 순식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여러 땀방울이 합쳐진 시간의 산물로 특히 19세기 파벨 트레차코프의 업적은 세계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지난 칼럼 3편 ‘이동파의 활동’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이동파>가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를 통해 러시아 전역을 돌며 그림 전시활동을 펼쳤고, 러시아 최고 평론가가 그림에 예술적 무게를 실어주고 대부호 파벨 트레차코프가 그림을 구매해준다. 러시아 미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데 트레차코프가 든든한 재정적 지원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돈은 주조된 자유’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트레차코프의 이같은 컬렉션은 러시아 미술 세계에 예술의 자유와 그림 유통의 물꼬를 열어주었고, 돈이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당시 미술 분야에서 트레차코프의 권위는 황제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의 평가 한마디는 곧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정의’로 통할 만큼 큰 힘을 가졌다. 그런 트레차코프의 안목에 부응하기 위해 이동파 화가들은 진심으로 시대를 고민하고, 더 나은 예술적 표현을 위해 발전하려 노력했다.
러시아 민중 누구라도 관람할 수 있도록
‘대부호’ 트레차코프는 자신이 구매한 그림을 러시아 민중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모스크바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 미술관을 내어 전시했고, 누구나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예술의 대중화’를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한 이동파와 파벨 트레차코프는 당시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정신적 양식처를 제공해 준 것이다. 한마디로 트레차코프가 없었다면 지금의 러시아 미술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레차코프 미술관의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이런 주제의 그림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니’하며 감탄할 작품들이 즐비하다. 그가 없었다면 역사의 불구덩이 속에 모두 사라졌을 주제의 그림들이 지금 러시아 국민들에게 큰 문화 유산으로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역사의 불구덩이 속에 사라졌을’ 대표적인 그림이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이다. 일리야 레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작품이며,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폭군으로 기억되는 ‘이반 뇌제’가 광기에 빠져 자신의 아들을 쇠창살로 찌른 직후 정신이 번쩍 들어 아들을 부둥켜 안는 순간을 그린 그림이다. 꺼져가는 자신의 목숨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아들의 자포자기한 표정과 아들을 살해한 아버지의 정신이 반쯤 나간 표정이 너무나 처절하다.
레핀은 당시 황실의 극심한 언론·출판 검열 제도의 폐해를 고발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 속 이반 뇌제의 얼굴은 시인 겸 화가였던 ‘그리고리 마소예도프’를 모델로 했고, 죽어가는 아들은 당시 러시아 화가이며 중편 소설 작가였던 ‘가르신’이 모델이었다. 또 부자 옆에 널부러져 있는 왕홀(황제의 지휘봉)은 당시 예술가의 눈과 귀, 입을 통제하던 검열 제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작품이 처음 이동파 전시에 선보였을 때, 러시아 미술계는 술렁였으며 레핀의 천재적 표현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지만, 황실은 자신들을 표현한 레핀을 비난하며 전시 금지를 명했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는 1881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다 대대적으로 ‘피의 숙청’이 이뤄지고 있어 민심이 매우 흉흉한 때였다. 레핀의 그림이 민중의 분노를 대변한다고 황실은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파벨 트레차코프는 황실의 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그림을 사들여 자신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강행했으며, 수많은 민중들이 그림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수많은 그림들이 트레차코프의 손에 살아남아 현재를 빛내고 있다.
트레차코프로 대변되는 러시아 인텔리겐챠
19세기 러시아 예술 발전의 원동력이 된 파벨 트레차코프는 대표적인 인텔리겐챠(19∼20세기 러시아의 혁명적 지식인)다. 러시아 인텔리겐챠는 보통 귀족과 잡계급으로 분류되는데 잡계급은 성직자나 상인, 의사, 작가 같은 직종의 사람들을 가르켰다. 특히 이들 중 러시아 상인 즉 대부호들은 사회 활동을 통해 러시아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등 문화 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러시아어로 ‘쿠페체스트보(kupechestvo)’라 불리는 상인 계층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병원, 학교 설립과 공공 봉사, 정교 성당 건축, 그리고 기부를 통한 예술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사회 후원자로 거듭났다. 특히 쿠페체스트보들은 돈에 대한 부르주아적 숭배 의식을 철저히 피하고, 자신의 가치를 재력보다는 민중을 위해 기부하는 공공 봉사 활동에 두었다. 이들은 러시아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었으며, 후천적 지식인이자 만들어진 귀족이었다. 쿠페체스트보는 러시아 민중을 위해 봉사하는 실천 수행을 통해 인간적 성숙에 도달할 수 있다는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이 중심에 파벨 트레차코프가 있었다.
“그림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작품들을 소장하여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국립 미술관을 남기고 싶다.”
러시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파벨 트레차코프는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밝히며 러시아 미술 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의 그림 수집은 1856년 러시아 아카데미 화파의 대표 화가 N.G. 쉴데르의 <유혹>과 V.G. 쿠댜코프의 <핀란드 밀수꾼과의 전쟁>을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트레차코프 컬렉션이 갖는 의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제도권에서 혜택받지 못한 이동파의 그림을 사들이고, 1870년 자신의 집에 미술관을 열어 일반인들에게도 그림 관람을 허용했다는 점에 있다.
1850~1860년대 러시아는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들사이에 강한 논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미술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서구주의자들은 러시아 회화가 지역과 현실에 갇혀 독창적인 것을 창조할 수 없으므로 서유럽 거장들의 작업을 답습하는 것만이 정답이라 주장했다. 파벨 트레차코프는 이를 강하게 부정하며 ‘러시아다움’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작품의 구매에 혼신을 다했다. 즉 트레차코프는 러시아 사람으로서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가장 러시아다운 그림을 수집하고 가장 러시아다운 미술관 설립을 추진했던 것이다.
미술관 찾는 이들에게 빵까지 제공해
트레차코프가 생존해 있던 1885년에 대략 한해에 3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미술관을 찾았다 한다. 서서히 문화 예술 대국의 바탕이 갖춰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트레차코프 미술관은,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 주기도 했다. 당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러시아가 안팎의 사건들과 문제로 신음할 때였다. 삶에 찌들린 민중들이 예술을 외면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언제든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니, 과연 실천적 지성의 면모가 돋보인다.

1천여점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며 내건 ‘조건’
트레차코프는 마침내 1892년 ‘러시아 그림들은 모두 민중에게 속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1276점의 그림, 471점의 드로잉, 10점의 조각과 동생 세르게이 트레차코프가 수집한 서유럽 미술품 84점이 있는 자신의 미술관을 국가에 기증한다. 기증하는 조건으로 미술관을 영원히 ‘무료’로 할 것, 그리고 부활절과 새해를 제외하고는 일주일에 4일 이상 오픈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특히 자신의 미술관이 소장한 컬렉션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 덕분에 어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트레차코프 미술관의 소장품은 다른 미술관으로 흩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1892년 8월 15일 ‘파벨과 세르게이 트레차코프 시립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매년 15만 명 이상이 찾는 모스크바의 명소가 되었다. 현재의 공식 명칭은 ‘국립 트레차코프 미술관’이다. 1918년 러시아 혁명 후 이 시립 미술관은 국유화되었다.
트레차코프 미술관은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박물관이며, 파벨 트레차코프는 러시아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교과서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한 나라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큰 축복이자 행복이 아닐 수 없다. 현재까지 어떤 역사적 혼란 속에도 굳건히 문화 유산을 지켜낸 러시아 민족의 노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이제 숨을 고르고 2편으로 넘어가서 파벨 트레차코프가 컬렉션한 그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 바로 클릭 !! 이어서 ②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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