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살자, 프란시스코 고야

[엄마와 함께 플라뇌르] “대체 바르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고야의 그림이 가르쳐주는 길을 찾아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초상화, 1800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초상화, 1800
  • flanuer / 불어. 형용사로는 ‘한가롭게 거니는’, 명사로는 ‘산책자’. 엄마의 말을 아껴 담다. 엄마의 그림 공부를 딸이 정리하다.

“칭찬은 구체적으로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냥 멍청한 아첨으로 들린다고. 비판이나 충고도 가능하면 하지 마. 그거 막판에는 하는 사람이 본인한테 취해서 결국 자기 자랑으로 마무리하기 쉬워. 안 할수록 좋아.”

“응?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는 천천히 운전 중이었고 엄마는 조수석에 있었다. 하지만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엄마에게 되물었다. “엄마 저거 때문이지?” 서로 속을 알아버리고는 마주 보며 웃었다. 엄마와 내가 둘 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싫어하는 표지석. ‘바르게 살자’ 때문이었다.

어떻게 바르게 살라고?

아주 한참 전에 ‘바르게 살자’ 표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가 내게 말했다. “가서 싸인펜 좀 가져와. 저 밑에다 써놓게.”, “뭐라고?”, “뭐 쓸 것이야 많지. ‘바르게 살자, 너나’, ‘바르게 살자, 각자’, ‘바르게 살자, 알아서’” 엄마의 싱거움에 나는 횡경막이 아프도록 크게 웃었다. 엄마 말이 맞지 싶었다. 저렇게 공공의 장소에서 허공을 향해 ‘바르게 살자’라고 강하게 외치려면 최소한의 방향성을 제공하는 약간의 친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부터, 어떻게, 왜, 누가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자칫 불특정 다수를 꾸짖거나 훈계하는 투로 느껴지기 쉬우니까. 심지어 나와 우리 엄마 같은 몇몇은 이를 폭력적이라 느끼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 물론 어떤 분은 이러한 생각에 혀를 차며 ‘바르게 살자는 것이 무엇이 어떠냐? 늘 생각해야 하는 화두 아니냐?’ 하실 수도 있겠다. 그것도 맞는 말씀이다. 그리 생각하셔도 우리가 이 시대를 함께 지내는데 무리가 될 일은 없다.

하지만 바르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이 되는 시절이라거나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개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시대를 사는 모두 혹은 개인에게는 친절한 존재 그 이상, 훈계나 충고는 삼가며 끝까지 돌아볼 수 있도록 격려하는 친구나 선생, 혹은 그만의 시간이 절실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돌아보면 어느 생이건 인생은 개인의 것만은 아니다. 항상 시대를 감당하고 자신의 삶을 산다. 따라서 ‘바르게 산다’는 명제 역시 그 답은 개인의 삶과 시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간이 씨줄 날줄로 엮어지며 그려진다. 뿐만인가. 개인의 삶이야 각각의 운명에 따라 그 답이 다르다 해도 방랑자를 위한 북극성처럼 끝까지 쥐고 굳세게 나아가야 할 인류 공동의 답도 요구된다. 영원히 찾지 못할 답이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잘 사는 건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인가? 그 답을 알고 싶을 때, 누구라도 그 답을 좀 나지막이 친절하게 알려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그런 시간에 떠오르는 작가는 단연코 ‘프란시스코 고야’다. 그의 작품과 생애는 폭력적이고 어두운 것을 묘사한 듯하여도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답을 향해 나아간다. 그가 정답을 쥐고 있거나 ‘이것이 답이오’ 단답형으로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정답을 찾아 헤맨 인류로서 그는 위대한 동료이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여럿을 연달아 보든, 한 작품을 오래 보든 마음에 힘이 딱 들어선다. 잊지 말자. 길이나 답을 잃은 것 같을 때, 마음에 힘이 필요할 때는 프란시스코 고야! 이제 작품 몇을 보고자 한다.

보쇼, 임금과 그 가족들은 벌거벗었다오

이 그림이? 내 속에 힘이 들어간다고? 마음에 힘을 준다고? 그럴 리 없다 싶다. 첫인상이 그럴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어느 하나 매력적으로 묘사된 개인이 없고 작품이 지닌 회화적 완성도는 오히려 등장한 군상들의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이 작품은 궁정화가였던 고야가 1800년에 그린 ‘카를로스 4세와 가족’이다. 실은 이 그림은 아찔한 작품이다. 작품 속 왕과 왕족들이 이 그림이 이대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 그 아둔함을 가늠해보면 그것부터가 공포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려진 당대 최고의 권력을 비판한 미술사 최고의 풍자화 중 하나다. 200년이 훌쩍 넘도록 이 그림은 당시 스페인 왕과 왕가의 타락과 무능, 기울어가는 국가의 위태한 존망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이 그림의 주제가 된 권력은 이러한 그림을 용감하게 세상에 전시하고 내놓았다.

얼핏 보고 자세히 봐도 그림 속 등장한 인물 가운데 어느 하나 야무지거나 유능해 보이는 인상은 없다. 보석과 비단으로 감싼 그들의 눈동자는 공허하고 시선은 사방으로 흩어져있다. 왕은 무능하고 허약해 보이고 왕을 제치고 화폭의 정중앙을 차지한 권력자인 왕비 마리아 루이사는 탐욕스러워 보인다. 심지어 화폭의 아이 중 누구는 왕인 카를로스 4세의 아이가 아닌 왕비의 정부, 고도이의 자녀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지금 이곳 대한민국에서까지 돌고 있다. 이것만큼 이 왕조가 무능했다는 증거가 또 있을까. 저 그림 속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라도 정신을 차렸거나 주변의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면 저 그림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랬다면 좋게 말해 다시 그리라고 했거나 고야가 궁정화가의 자리를 잃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고야는 어쩌자고 왕가의 초상화를 저렇게 고발 르포처럼 그렸을까. 고야는 주변의 동료들로부터 ‘초상화 공장이냐’는 놀림을 받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1789년에는 정식으로 궁정화가가 되었고 1799년 수석 궁정화가가 되어 최고의 대우를 누렸던 때였다. 그 이듬해 1800년에 그린 그림이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인 것이다. 세상에 대놓고 그러나 점잖고 묵직하게 소리를 질러 버린 것이다. “좀 보쇼. 저 왕과 가족들은 벌거벗었소이다”라 말이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고야의 더 거대한 외침은 동시에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1792년 병마로 귀가 안 들리게 된 고야는 세상을 향해 외치기 시작한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그러니 깨어있으라’고 말이다.

이 시기, 청력이 5년 뒤에 회복될 때까지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에 이끌렸고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1799년 고야는 판화집 ‘카프리초스(변덕)’을 발표하였다. 심지어 궁정화가였을 때의 일이다. 이 판화집에서 고야는 또 다른 거대권력이었던 가톨릭의 부패를 소리 질러 알리고 마녀와 악마와 같은 미신에 사로잡혀있던 동시대의 사람들과 사회를 흔들어 깨웠다.

무엇보다 고야는 이러한 사회상이 사람들 개개인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최선을 다해 알리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잠시만 멈춰 자세히 들여다보면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날카로운 에칭의 판화의 선들 사이로 고야가 지닌 스페인 국민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차오르는 것을 말이다. 이성이 잠들고 괴물이 깨어난 사회에서는 곤궁한 상황에 놓인 농민이 타야 할 당나귀를 외려 업고 간다. 당나귀는 마치 말에 오른 귀족처럼 발에 박차를 달고 농민의 옆구리를 찰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말이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1799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1799
무능한 너, 1799
무능한 너, 1799

비극은 한꺼번에 닥치고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부조리와 부패, 무능이 쌓인 스페인은 외세에 의한 전쟁을 맞이한다. 1808년 프랑스 군대는 마드리드에 진입했고 프랑스 대혁명을 동경하던 스페인의 지식인들은 혼란했지만 프랑스 군대는 곧 그 정체를 드러낸다. 어디 프랑스뿐이겠는가. 국경을 넘어온 타국의 군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쟁과 전쟁 전후의 비극들은 어떤 파급력을 지니는지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 이미 생생하다. 그리고 늘 현재진행형인 것 같은 비극은 200년 전의 것도 마치 살아 움직이듯 고야의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다.

1808년 5월2일.
1808년 5월2일.
1808년 5월 3일.
1808년 5월 3일.

1808년 5월 2일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 민중을 진압하려고 마드리드 시내로 들어왔고 비참하게도 스페인의 군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스페인 자국 군대의 적극적으로 비열한, 기만적인 중립의 시간이 흐르고 1808년 5월 3일 스페인 민중 수백 명이 프랑스군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는 역사적인 이틀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6년 이상 계속되었고 ‘게릴라’라는 말을 탄생시킬 정도로 민중들의 피의 희생을 요구했다. 프랑스군과 스페인 게릴라는 부역자 색출과 복수를 거듭하며 서로를 고문하고 죽였다. 민간인 포함 총 100만 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비극이었다.

고야는 멈추지 않고 판화집 ‘전쟁의 재난’을 제작하였다. 그 판화집에는 피아 구분이 무의미한 공평한 처참함, 전쟁의 잔인함이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지옥의 시간 속에서도 고야는 궁정화가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현실적인 면모도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현명한 처사이자 훌륭한 처세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시 처자식에 형제자매까지 부양했던 고야의 상황이 첫째고 두 번째는 고야라는 작가 개인뿐 아니라 미술사 전체에서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정신의 최고점을 친 작품이라 생각하는 작품이 전쟁 이후 ‘검은 그림’ 연작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배운다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1819~1923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1819~1923

이 그림이 아니다. 고야 최고의 작품은 어머니 대지의 여신으로부터 자녀들에게 권력을 빼앗기리라는 신탁을 받고는 발기된 채 괴물 같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인식도 못 하고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그 악마의 밑바닥 그 밑의 검은 바닥을 보여주는 형형한 눈동자를 마주 보게 되는 이 그림이 아니다.

물론 이 그림 역시 고야 말년의 ‘검은 그림’ 연작 중 대표작이다. 그러나 눈을 뗄 수 없도록 동시대적이고 극도의 슬픔과 절망을 일으키며 완전한 연민을 불러오는 고야의 작품은 이 그림, ‘개’다.

개, 1820~1823
개, 1820~1823

저 개는 곧 죽을 것이다. 저 펄인지 모랜지 모를 늪에 빨려 들어가 잠기면 잊힐 것이고 지금 저 개의 눈동자는 체념인지, 슬픔인지, 살려달라는 것인지 살고 싶다는 것인지 신을 원망하는 것인지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앞으로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나 22세기가 되어도 저 개는 저렇게 애달프고 안타까운 존재로 남을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는 비극이자 슬픔이다.

고야가 왜 이러한 작품을 남겼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설명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고야가 험한 꼴을 너무 많이 봐서 미쳤거나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짐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 작품을 남길 무렵의 고야는 상당히 편안한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주변 가족들, 사람들과도 나름 온유하게 잘 지냈고 경제적인 것도 치밀하게 잘 관리했다. 단지 저 ‘개’라는 그림의 존재 이유로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로 80세가 넘었을 무렵 고야가 남겼다는 ‘지금도 나는 배운다’라는 말을 붙들어보았다.

생전의 고야는 말해왔다. “나에게 스승은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자연, 그리고 청각 장애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스승은 청각 장애다.”라고. 자신의 후천적 장애가 자신에게는 가장 큰 스승이었고 신이 내린 거장이었던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 신이 창조한 자연을 제외하고는 날 가르친 사람은 없다는, 한 마디로 ‘난 누구한테 그리 큰 빚을 진 적 없다’ 하고 큰 배포로 작업하고 살아왔던 사람인 것이다. 그랬던 그가 말년에 여전히 ‘지금도 나는 배운다’ 하였다.

이것은 그저 고야 본인의 겸손함을 표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태까지 살펴본 고야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나는 배운다.’ 이 말은 혹시 ‘지금도 나는 답을 찾고 있다’와 같은 문장은 아닐까. 또 전 생애를 통해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창조해 온 고야가 모두에게 ‘답’에 가장 근사치에 접근한 작품으로 남긴 것이 바로 ‘개’가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화가로서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야 마네나 피카소, 미로와 같은 후대의 화가들이 나누어 가졌다 하더라도 작품의 상당수를 통해 유난히 타인의 아픔과 비극, 인류 근본의 문제를 표현해왔던 고야가 말년에 남긴 걸작인 ‘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답을 세상을 향해 남겨준 것이 아닌가 짚어보는 것이다. 그리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연민이 있어야하지 않겠냐고

함께 고야의 그림을 한참 볼 무렵이었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저 개는 타고나길 불완전하게 타고난 인류를 상징하거나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생사 갖가지 비극, 나아가 죽음이라는 인류 공동의 운명을 목전에 둔 인간 개개인을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고. 또한 ‘저 그림은 마치 화가인 고야가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고. ‘당장 당신의 눈앞에 저런 개가 있다면 두 팔을 내밀어 온 힘을 다해 구하고 싶지 않냐, 구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한 연민만이 인류에게 유일한 구원이 아니겠냐’고. ‘내가 왕이고 권력이고, 불의고 의로움이고, 전쟁이고 투쟁이고, 질병이고 욕망이고 간에 겪을 만큼 겪어봤는데 결국 우리는 저 한 마리 개와 같은 존재들이요. 우리를 구원할 것은 그 개를 구하고자 하는 연민이 아니겠냐’고 되묻는 것 같다고 말이다.

엄마의 그 이야기에 맞겠다 틀리겠다 답을 미루고 더 큰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야의 작품과 생을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으며 고야의 생의 장면들과 연관 지어 본다.

돌아보면 고야의 생의 장면들은 ‘바르게 살았다’ 하기에 충분했고 충실했다. 초상화 공장이라는 놀림을 들을 정도로 유려한 색감의 초상화를 대량으로 작업했을 때에도, 궁정화가가 되고 그 지위를 충분히 누릴 때도, 그랬음에도 왕과 왕가, 스페인 상류층과 종교의 부패와 무능을 신랄하게 풍자해냈을 때에도, 전쟁의 참혹함을 묘사했을 때도, 그러면서도 궁정화가의 지위를 유지하고 현실적으로 가족들을 돌봤을 때도, 다 뒤돌아 앉아 추악한 인간 본성의 본질에 침잠해 검은 그림을 그려 나가며 한편으로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풍요롭게 잘 지냈을 때도 그의 모든 생의 장면들은 서로 부딪히거나 부정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그는 작품 ‘개’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권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우리도 이런 존재인데, 왜 서로를 연민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고야를 통해 우리도 생의 몇 장면은 바르게 살 수도 있겠다 용기를 내어본다. 고야처럼 때로는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거나 두려워도 불의와 싸울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먹고 사는 일로 돌아가 현실에 충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다 출세를 하더라도 인간이 무엇인가 질문을 끊임없이 놓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인생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유연하게 나 자신의 자리, 제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고야 말년의 작품 ‘개’가 알려주는 것처럼 ‘기꺼이 서로를 연민하고 지체하지 않고 너를 그리고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자주 바르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는 답 비슷한 것을 손에 쥐어보는 것이다.

잊지 말자. 생의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서 길을 잃었거나 희비극 사이에서 답을 잃은 것 같을 때, 무엇보다 마음에 힘이 필요할 때는 ‘프란시스코 고야’다.

글쓴이

송세인 스튜디오아우룸 대표

송세인 스튜디오아우룸 대표는 문화인류학과 북한학을 익혔다. 방송작가로 십 년, 보좌진으로 십 년 가량을 지냈다. 뒤늦게 화가의 길을 가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작품을 바로 보려 미술사를 독학하신 어머니. 우선은 어머니의 공부가 재미있어 글로 정리하여 함께 나누려 한다. 유난히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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