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자랑스런 할아버지 이순신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에 부쳐] 영화에서 만난 13대조 충무공 할아버지 어릴적부터 ‘충무공의 후손’이란 자부심 “노량대전서 전사” 수용하지만 논란 여전 ‘전쟁의 신’보다 ‘구국의 성웅’ 추앙되길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김윤석 분)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김윤석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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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순신 장군의 14대손이다

지난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가족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상암 월드컵경기장의 영화관에서 『노량– 죽음의 바다』를 관람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상당히 많은 관람객이 진지하게 영화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1545∼1598)은 역시 한민족,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장 존경받는 위인 몇 분 중 한 분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필자의 족보에 대한 자부심도 뿜뿜 높아지면서 충무공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났다.

필자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다.

2023년 봄에 작고하신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필자가 어릴 때부터 ‘우리가 충무공의 후손’임을 누누이 말씀해주셨고, 충무공에 대한 높은 사회적 평가를 기반으로 어느덧 필자 역시 위인들 중에서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하고 흠모했다. 그분에 대해 일반 사람들보다는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된 것도 자연스러웠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필자의 13대 조부이시니, 필자는 그분의 14대손이다. 영화에서는 충무공의 맏아들인 회(李薈, 1567∼1625)와 셋째 아들인 면(李葂, 1577∼1597)이 등장하는데, 필자의 12대 조부인 충무공의 둘째 아들 열(李䓲, ?∼?)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좀 서운하다.

동영상=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 메인 예고편.

충무공의 둘째아들 ‘이열’에 대해

이열(李䓲). 이 분은 특이하게도 생몰연대가 모호하다. 회(李薈)가 1567년에 태어났고 면(李葂)이 1577년에 태어났으므로 1567년과 1577년 사이에 출생하셨을텐데, 출생 시기는 물론이고 사망 시기까지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난중일기』에 따르면 아버지 이순신 장군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순신 장군이 60번이나 이름을 언급할 정도로 사랑이 컸던 것 같다. 음서로 정랑 벼슬을 지냈고, 인조 때 승정원일기의 기사에 따르면 인조 9년(1631년) 당시 충훈부 도사로 재직 중이었다는 정도만 확인이 된다.

이 분의 이름도 논란이 많다. 한자인 열(䓲)의 발음 때문에 인터넷에 “예” 또는 “울”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선친께서는 『난중일기』에 “열”로 발음하라는 내용이 쓰여있으니 “열”로 읽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 『난중일기』를 찾아봤더니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1597년 정유년(丁酉年) 5월 3일 일기에 “3일(癸巳) 맑음. 신 사과(신정), 응원(방응원), 진흥국이 돌아갔다. 이기남(李奇男)이 와서 만났다. 아침에 둘째 아들 울(蔚)의 이름을 열(䓲)로 고쳤다. 열(䓲)의 음은 열(悅)이다. 싹이 처음 생기고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는 대목이 있다.(『쉽게 보는 난중일기 완역본 : 한산 명량 노량 해전지와 함께』 이순신 저/노승석 역. 도서출판 여해. 2022. 10. 10.)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장남 '이회'(안보현 분)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장남 ‘이회’(안보현 분)

이 정도면 덕수 이씨로서 자부심이...

혹시 독자들 중에 대한민국 지폐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가문이 어디냐고 하는 우스개 퀴즈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정답은 ‘덕수(德水) 이(李)씨 집안’이다. 무려 세 분이나 등장한다. 5백원권 지폐에 이순신 장군이, 5천원권 지폐에 율곡 이이 선생이,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새겨져 있다. 요즘에는 5백원권 지폐가 통용되지 않아 충무공이 100원 동전에만 새겨져 있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신사임당의 경우, 이원수(李元秀)라는 분과 결혼해서 덕수 이씨 가문에 성명이 올라갔으니 우리 집안 어른이 맞기는 맞다. 참고로, 율곡 이이 선생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9촌 숙질(叔姪) 간으로서 율곡 선생이 아저씨 뻘이었다.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는 이순신 장군 초상화.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는 이순신 장군 초상화.

초⋅중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내용들도 갑자기 생각났다.

충무공의 삼남 이면(李葂)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고향 아산에 쳐들어온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일화, 충무공의 부인인 방씨 부인이 어릴 때 떼강도가 집에 쳐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 방진 군수가 급히 화살을 찾자 길쌈할 때 쓰던 배댕이 묶음을 한아름 대청마루 위에 내던져 이에 화살이 많은 것으로 오인한 강도들이 도망쳤다는 일화도 있다. 또 충무공이 목포시 유달산(儒達山)에 있는 거석(巨石) 봉우리인 노적봉(露積峯)을 짚과 섶으로 둘러 군량미가 산더미같이 쌓인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하고서 적을 공략하였다는 일화를 접하고 배운 바 있다.

1970년대 어린 시절 얘기이니 그후 교과서 개편이 많이 있었을 텐데, 요즘도 그러한 이순신 장군 관련 일화들이 학생들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내용인지 자못 궁금하다.

21세기에 새로 불거진 논란들

충무공은 업적도 훌륭하시지만 워낙 불꽃처럼 극적인 삶을 사셨기에 정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어 회자되고 연구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과 류성룡⋅원균⋅선조와의 관계, 백의종군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한산도대첩⋅명량해전⋅노량해전에서의 특별한 승리, 노량해전에서의 장군의 죽음이 혹시 계획된 것은 아니었는지, 과연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정말로 사망하신 것인지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집안에서는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21세기 들어서 논란은 더 커졌다. 현충사 내 이순신 장군 고택부지 및 종가유물 경매 위기(2009년), 『난중일기』 중 을미(1595년)일기 행방불명 논란(2010년)에 이어 원균이 이순신⋅권율과 함께 임란 선무일등공신에 제수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조선실록(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을 부정하고 원균을 임진년 해전 연승의 주역이라 주장하며 원균의 후예인 국회 국방위원장을 필두로 활발히 벌어졌던 원균 신원⋅명예회복운동(2013년)도 근래에 있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충사 현판 철거 및 조선 숙종 현판 반환을 둘러싼 소송(문화재청 vs. 종부 ; 2018∼2019), 대만 장개석 총통의 이순신 추모 친필 현판 소유권 분쟁(현충사 vs. 종부 ; 2018) 등 상당히 충격적이고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김한민 감독이 명량/한산/노량 3부작을 완결한 것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몇몇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수로만 인식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분을 ‘성웅(聖雄)’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분이 충효에 기반한 바른 가치관을 토대로 치열한 고뇌와 노력을 통해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돌파하고, 결국에는 임진왜란 당시 풍전등화⋅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여 있던 조국을 구해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훨씬 더 입체적⋅심층적으로 연구되고 추앙되기를 소망한다. 필자도 자랑스러운 이순신 할아버지를 더욱 더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해본다.

글쓴이

이준 전 국회의원 보좌관

필자인 이준은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4대손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3년간 국회에서 보좌관 생활을 하며 10명의 국회의원을 보필했다. 문희상 국회의장 비서실, 김덕규 국회부의장실, 홍재형 국회부의장실에서 일했다. 2002년 12월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캠프 현장유세반에서 활동했다. 현재 (주)OGF 대표이사로 재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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