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의 전통...”폭군을 용납하지 않는다”

개국 직후 고구려, 세 차례 ‘폭군 제거’ “백성을 괴롭히는 왕은 제거한다” 백성을 위한 ‘민본주의’ 전통, 전래돼 윤석열, 한민족의 ‘민본주의’ 가볍게 봐

1987년 6월10일부터 6월29일까지 전개된 6월항쟁.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인 6월항쟁은 4·13 호헌 조치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됐다.
1987년 6월10일부터 6월29일까지 전개된 6월항쟁.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인 6월항쟁은 4·13 호헌 조치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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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민주주의 수호에 목숨걸까

2024년 12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12월 3일 늦은 밤, 윤석열은 뜬금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나라 전체를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어놓았다. 황당하고 불쾌한 감정이 반사적으로 분출됐다. 그러다 1980년 전후 경험했던 계엄령의 쓰린 기억이 되살아오면서 일말의 두려움도 나의 감정선을 휘감았다.

계엄 선포 2시간 반만에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안을 채택하면서 반전의 드라마가 전개됐다. 그 짧은 시간에 국회 주변에 수천 명이 모여서 계엄 반대를 외쳤다. 국회 봉쇄 임무를 담당한 경찰은 국회의장이 담장을 넘어가는 상황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계엄에 반대했다. 국회의원 체포와 격리 등의 명령을 받고 헬기를 타고 국회에 출동한 국군 특수부대원들은 유리창 한 장을 깨고 건물에 진입하는데 30분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계엄령에 반기를 들었다. 그 사이에 국회의원 192명이 본회의를 열고 계엄 해제 결의안을 가결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취약하다는 점도 드러났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점도 동시에 확인된 것이다. 물론 아직 윤석열의 내란사태는 완전 진화되지 않고,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이처럼 든든한 민주주의를 누리는 것은 지난 수십년 동안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끊임없이 투쟁한 결과라는 점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잔혹한 국가폭력으로 최소한 345명이 고귀한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는 참극이 발생했다. 시위는 진압됐고, 국민에게 총격을 가한 군부 독재자는 대통령이 됐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까지 진압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 국민은 1987년 6월 총궐기해서 군부 독재자들로부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헌법 개정을 관철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다른 질문에 접하게 된다. 1980년 광주 시민이나 1987년 민주화 시위대는 언제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결의가 생긴 것일까? 자유를 바라는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사한 사례가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것을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 ‘민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고구려 역사...폭군은 제거한다

민주주의와 민본주의는 유사하지만, 차이도 명확하다. 민주주의는 국가 권력 소재에 주목하는 것으로 국민이 권력의 소유자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민본주의는 국민을 본위로 해서 정책을 추진한다는 기조를 강조한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민본주의는 당연하지만, 군주주의에서도 민본주의가 있을 수 있다. 조선시대와 고려시대는 군주주의고, 민주주의도 없었지만, 민본주의는 있었다. 우리 전통문화에 민본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서양에서 들어온 민주주의 발전이 매우 빠른 시간에 이뤄진 것이다.

한국에서 민본주의는 언제 나타났을까?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서기 53년 제5대 모본왕이 신하의 칼을 맞고 죽은 사건에 주목하게 된다. 모본왕은 성격이 포악해서 사람을 괴롭힌다는 악명을 갖고 있었다. 자리에 앉거나 누울 때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아 누웠다. 밑에 깔린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죽였다고 한다. 인간 베개 역할을 하던 신하 두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는데, 주변 사람 하나가 국왕은 잔학해서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라면서 죽이는 것이 맞다고 권고했다. 두로가 칼을 품고 있다가 왕을 죽였다. 신하들은 종실 중에서 신망이 높은 재사의 아들을 차기 국왕으로 추대했다.

두 번째 사례는 서기 165년에 일어났다. 제7대 차대왕도 횡포와 악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망이 컸다. 고위 관리인 우보 고복장, 태조왕의 아들 막근 등을 죽였다. 국상인 명림답부가 신하들을 규합해서 쿠데타를 벌여 차대왕을 시해했다. 명림답부는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라서지 않고, 차대왕의 동생인 백고를 제8대 신대왕으로 추대했다.

서기 300년 9월, 제14대 국왕인 봉상왕 축출 사건을 계기로 국왕이라고 해도 백성을 괴롭히면 죽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민본주의가 국가 통치의 주요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상왕은 사납고 강퍅해서 자신에 대한 반역 음모 가능성에 집착하고, 결국 국가적으로 인기가 높은 숙부 달가와 자신의 동생 돌고를 숙청한 폭군으로 나온다. 궁궐은 아름답게 꾸미지만, 백성들은 봉상왕의 학정에 시달렸다. 결국 국상 창조리가 궁궐 보수 등으로 백성을 괴롭히지 말 것을 건의했다. 봉상왕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국왕인 만큼 궁궐이 화려해야 한다면서 국상이 백성들의 칭송을 얻기 위해 자신을 헐뜯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창조리는 왕이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고 보고 신하들을 규합해서 왕을 폐위했다. 왕은 두 아들과 더불어 자살했다. 창조리는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지 않고 왕의 조카인 을불을 찾아서 차기 왕으로 추대했다.

1929년 11월3일 봇물같이 터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재현한 행사. 사진=연합뉴스
1929년 11월3일 봇물같이 터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재현한 행사. 사진=연합뉴스

2천년의 전통, 일제가 지우지 못한 ‘민본주의’

위에 제시한 세 가지 사례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왕이 백성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제거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신하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폭군을 제거하고, 종실 중에서 후계자를 선정해서 차기왕으로 옹립했다는 점이다.

고구려 역사 초기 300년 이내에 국왕 3명이 폭군이라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제거되는 상황은 고구려가 북방 유목민족이나 한족 국가와 끊임없이 전쟁을 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외적과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권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을 것이다. 평소 백성들에게 폭정을 하게 되면 전시에 자발적 전투 참여를 기대할 수 없고, 왕조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는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300년 봉상왕 이후 고구려에서는 폭군으로 기록된 국왕은 없다.

민본주의 전통은 고려로 이어졌다.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 건국 초기부터 세력이 강했던 지역 호족들의 협력을 받아야했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지 못했다. 오히려 왕건은 신하들이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을 허용해서 자신이 폭정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노력을 전개했다.

고려 6대왕 성종 시기에 감찰 기관인 어사대가 설치됐고, 제11대 문종 시기에 중서문하성 낭사가 설치되면서 간관(諫官)제도가 체계적으로 정비됐다. 왕의 잘못을 비판하는 기능은 당태종이 남긴 정관정요에 나온 내용으로 현신 위징이 수행한 역할이다. 고려 초기 국왕들이 정관정요를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당태종 교훈이 고려에서 채택된 것이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확산하면서 대간(臺諫)의 특성이 선비 문화의 중심 특징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초기 성리학이 만개하고 대간이 삼사로 확대되면서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게 된다.

아마도 윤석열 대통령이나 그의 추종 세력은 한국 민주주의가 서양에서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역사가 깊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폭 테러와 같은 계엄 선포를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만약 한국 전통문화의 한 축인 민본주의를 존중하고 실행했다면 탄핵이 아니라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과거 일제에 망하고, 일제 식민지주의 사관에 따른 역사를 배운 것이 과도하게 자학적인 역사관을 갖게 되고 우리 역사와 전통 문화에 대한 오해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도 많이 흘렀으니 생각을 바꿀 때도 됐다. 우리 전통문화의 긍정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촘촘히 살펴보고 우리가 지금 활용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이 무엇인지 검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글쓴이

왕선택 서강대 대우교수

왕선택은 YTN 방송기자로 재직하는 동안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국제정책실무 석사를, 서울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를 취득했다. 통일, 외교, 국제 문제를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의 전통 문화, 특히 선비 정신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민족의 독특한 문화와 특성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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