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역사, 자연을 품은 퐁타벤 미술관
[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상징주의자들에게 깊은 영감줬던 퐁타펜 아름다운 자연 중세 분위기에 화가들 몰려 폴 고갱과 베르나르 만나 ‘종합주의’ 태동 4500 여점 소장품, 오르세 미술관도 위탁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려 한 상징주의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상응(Correspondances)」에서 “자연은 살아있는 기둥들로부터 /이따금 어렴풋한 말들이 새어나오는 하나의 신전”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은 끊임없이 그 아래에 숨겨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인데요. 보들레르의 이 시구(詩句)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상징주의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게 됩니다.

마치 보들레르의 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림이 여기 있습니다. 에밀 베르나르가 1888년에 그린 <사랑의 숲에 있는 마들렌>인데요. 화가의 동생 마들렌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적막한 숲에 홀로 누워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듯도 하고 자연이 들려주는 말을 듣고 있는 듯도 합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 것은 프랑스 브르타뉴의 작은 마을 퐁타벤이었습니다.

산업혁명에도 때묻지 않은 작은 시골마을
퐁타벤은 아벤(Aven) 강이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로 파리에서 534㎞ 떨어져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는 인근 도시까지 가는 기차를 이용하더라도 14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미국과 유럽 국적의 많은 화가들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퐁타벤은 산업혁명 이후 급격하게 근대화된 대도시와는 다른 풍경과 삶이 펼쳐지는 곳이었습니다. 아벤 강뿐만 아니라 강변에 있는 ‘사랑의 숲(Bois d’Amour)’과 물레방아들, 인근의 선사시대 거석, 전통가옥과 의상, 토속신앙과 기독교적 믿음이 절묘하게 혼융된 이곳에서 화가들은 어디서나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화가들을 환대했고 누구나 어디서든 친절하게 포즈를 취해주었으니 비싼 생활비뿐만 아니라 모델료도 만만치 않았던 파리와 비교하면 주머니가 가벼운 예술가들에게 이상적인 곳이었습니다.
미국 화가 ‘헨리 베이컨’은 퐁타벤에서 1864년 여름을 보낸 후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예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통칭 ‘미국사람들’로 불린 이들이 1880년대의 여름철에는 100명이 넘었다고 하니 이 작은 마을이 얼마나 활력에 넘쳤을 지 상상이 됩니다. 1880년대에는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 폴 세뤼지에와 같은 프랑스 화가들도 머물면서 퐁타벤파(派)를 형성하게 되는데요.
퐁타벤에는 그 시절의 예술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미술관이 있습니다. 바로 “퐁타벤 미술관”인데요. 미술관은 가난한 화가들에게 언제나 관대하고 친절했던 줄리아가 운영하던 호텔의 별관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미술관으로 함께 가볼까요?
작은 호텔에서 발흥한 ‘퐁타벤파’
미술관은 강을 뒤로 하고 ‘호텔 줄리아’ 본관이 있던 곳과 시청을 지나 오른쪽에 있습니다. 미술관이 문을 연 것은 1985년입니다. 19세기 후반 예술의 흔적을 쫓아 많은 사람들이 퐁타벤에 왔지만 추억할 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는데요. 그러던 차에 1960년대에 지역의 예술 애호가들이 발벗고 나서서 고갱과 퐁타벤파의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에는 “퐁타벤 회화 협회 Association dela peinture de Pont-Aven”(후에 “퐁타벤 미술관 친구 협회 Association des amis du Musée de Pont-Aven”로 명명)가 만들어지고요. 이때부터 예산확보와 미술관 건립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1985년 6월 1일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개관 당시 미술관은 소장품은 거의 없었고 각종 문헌과 자료 전시, 그때그때 이루어지는 기획전시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전시공간도 850㎡으로 협소했고요. 소장품이 늘어나고 관람객도 점점 많이 찾아오자 협회는 2013년 9월 공사를 시작해 2016년 3월 26일 재개관했습니다.
새롭게 단장한 퐁타벤 미술관에서는 미술관이 단순히 작품을 보는 곳이 아니라 예술적 체험을 확장하고 증폭시킬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 보존된 옛 호텔 줄리아 별관의 파사드나 예술가들을 환대했던 ‘줄리아 길루’(Julia Guillou, 1846-1927)를 기리는 ‘줄리아 룸’, 당시의 생활상과 풍경을 보여주는 영상과 사진자료 덕분에 관람자들은 우선 19세기 중후반의 퐁타벤으로 시간여행을 훌쩍 떠납니다.

그렇게 한참 19세기 풍경에 빠져있다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면 그림에서와 똑같은 마을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과거와 현재, 예술과 현실이 끊임없이 중첩되고 교차되는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옛건물은 유리와 목재, 금속으로 지어진 현대적인 건물로 연결되는데요. 덕분에 전시공간은 두 배(1,674㎡)로 확장되었고, 거대한 유리벽은 ‘필리제 정원’(Jardin Filiger)으로 불리는 내정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줍니다. 필리제 정원은 미술관에 소장된 ‘샤를 필리제’(Charles Filiger, 1863-1928)의 풍경화 <바위가 있는 풍경, 르 풀뒤>(1891)를 토대로 만든 정원입니다.
미술관을 찾은 방문객들은 화가들이 무수히 그렸던 브르타뉴의 풍경과 식생, 즉 암석과 관목, 수국, 그라스, 덤불 등이 거대한 곡선을 형성하며 굽이치는 전경을 만나게 되는데요. 정원은 야트막한 경사로 되어있어 어느 층에서 보더라도 잘 보여서 브르타뉴의 자연을 손에 잡힐 듯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폴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의 ‘종합주의’
미술관으로 들어가볼까요. 미술관은 3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1층과 2층 도입부에서는 19세기 중, 후반의 삶의 풍경, 호텔 줄리아를 비롯한 화가들이 머물렀던 공간들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들과 영상, 외국 화가들이 그린 풍경화들을 볼 수 있습니다. 1880년대 이전 퐁타벤을 자주 찾았던 외국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2층에서는 1880년대에 고갱을 비롯한 프랑스 화가들이 오면서 퐁타벤파가 탄생되는 과정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도록 전시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재개관 당시 기준, 미술관은 4,500여점의 소장품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지역 공동의 공적 기금(FRAM: Fonds régional d’aquisition pour les musées)이나 지방 자치 단체와 시의 지원, 미술관 친구 협회나 기업/개인 기증, 오르세 미술관을 비롯한 대형 박물관/미술관으로부터 위탁 전시 등을 통해 개관 40년만에 명실상부 퐁타벤파의 보고(寶庫)가 되었습니다. 3층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기획전시가 이루어집니다.

퐁타벤파하면 우리는 언제나 폴 고갱을 떠올리게 됩니다. 1906년에 피에르 지리외드가 그린 <폴 고갱에 대한 경의>는 퐁타벤의 화가들 사이에서 고갱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에밀 베르나르의 역할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고갱과 베르나르가 처음 만난 것은 1886년 퐁타벤에서였습니다. 고갱은 38세, 베르나르는 18세였을 때였죠. 누가 봐도 폴 고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 같지만 그 당시 고갱은 이제 막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했던 때이고 베르나르는 이미 ‘클루아조니즘’을 실험하던 중이었습니다.
‘구획주의’로 번역할 수 있는 클루아조니즘은 중세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윤곽선을 진하게 그리는 기법입니다. 형태와 형태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단순화시킴으로써 구획된 형태들은 자연스럽게 평면적인 색면을 이루면서 회화는 단순화되고 장식적이 되었는데요. 퐁타벤에 도착한 초기에 고갱은 여전히 인상주의풍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나르의 ‘클루아조니즘’을 받아들이고 점점 대담한 구도와 강렬한 색채를 시도하게 됩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두 화가는 1888년 ‘종합주의’의 원리를 세웁니다. 종합주의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생각을 담아 색면, 선, 형태의 조화 속에서 아름답게 종합해서 그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려 하므로 상징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갱이 그린 <설교 후의 상상>(1888), 베르나르의 <사면 혹은 풀밭의 브르타뉴 여인들>(1888)이 종합주의의 선언서와 같은 그림들입니다. 이후 두 사람은 새로운 예술을 이끈 주도적인 역할에 대해 이견이 생기면서 멀어지게 됩니다.


퐁타벤은 나비파의 탄생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요. 1888년 이곳에 온 폴 세뤼지에는 글로아넥 하숙집(Pension Gloanec)에서 처음으로 고갱을 만납니다.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그해 10월에 그린 그림이 <부적>(1888)이고 이 작품에는 ‘퐁타벤의 사랑의 숲에서’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파리에 돌아간 세뤼지에가 친구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면서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 등의 화가들과 함께 결성한 것이 나비파이고요.

그런데 1889년에 퐁타벤을 다시 찾은 고갱은 퐁타벤에서 20여㎞ 떨어진 바닷가 마을 ‘르 풀뒤’(Le Pouldu)로 갑니다. 이후 르 풀뒤는 제2의 퐁타벤이 되어 많은 화가들이 모여들게 되고요. 이름도 낯선 르 풀뒤는 어떤 곳일까요?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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