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들을 한여름날에 비할까요?

[서평] 시집 ‘희망은 한 마리 새’에 대해 정경심 교수 글, 김석희 화가 그림 자유 잃은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 잃지 않아

영문학자 정경심 교수가 선정한 영미시 61편을 모아 해설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담았다. 삽화는 김석희 화가의 그림이 활용됐다.
영문학자 정경심 교수가 선정한 영미시 61편을 모아 해설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담았다. 삽화는 김석희 화가의 그림이 활용됐다.

▶ 유튜브로 칼럼 듣기

빌어먹을 사내 놈들이란 꼭 빌어먹을 버스 같아.

너를 1년이나 기다리게 해놓고는

겨우 한 대가 정류장으로 다가오자마자

두 대 아니 세 대가 꼬리를 물고 뒤따라오네.

- 웬디 코프, <빌어먹을 사내놈들이란> 중에서

셰익스피어부터, 엘리자베스 1세, 조지 고든 바이런 경, 윌리엄 블레이크,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디킨슨, 월트 휘트먼, 로버트 프로스트… 현재 생존하는 대중적인 시인 웬디 코프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의 기간 동안 각 시대를 대표했던 뛰어난 시인들을 다룬 책을 읽었다.

영미시 모음집 『희망은 한 마리 새』(정경심 지음, 스토리두잉 출판사)에 실린 통찰력 있는 절묘한 문장들이 독자의 마음을 깊이 파고든다. 그런데 그 많은 주옥 같은 명시들을 읽고 나서 지금 내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이것이라니. 다소 경박한 취향을 들킨 것 같아 머쓱하지만 모든 시를 직접 선정하고 번역한 저자 정경심은 위의 시를 해설하며 이렇게 말했다.

“쉽게 읽히면서 신랄함과 위트가 두드러지는 시입니다. 어쩜 이렇게 우리네 인생과 똑같은지 무릎을 탁 치게 되지요. 이 시에서 ‘사내놈들’의 자리에 대신 ‘기회’를 대입해도 별 손색이 없습니다…한 치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리고 다음 선택이 ‘최선’인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우리네 운명이지요…

얼핏 사소해 보이는 일상을 재료로 삶의 속성에 대한 깊은 이야기로 끌고 간 시입니다. 그래서 그 신랄함에도 불구하고 묻어나는 훈훈한 위로가 있습니다. ‘아,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조국 전법무장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지난 몇 년간 대중의 관심을 받았지만, 저자 정경심은 영국 애버딘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줄곧 연구와 강의를 이어온 영문학자다. 그리고 이미 20년 전부터 ‘영미시의 대중화’를 위해 은퇴 후에 내놓을 영미시 모음집을 기획했었다. 그러나 수감 생활로 자유를 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시를 다시 읽으며 형언할 수 없는 평정심을 느끼고 예정보다 이른 시기에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영문학자 정경심 교수
영문학자 정경심 교수

사랑과 이별, 성공과 실패, 부당한 차별과 고통, 삶의 허무, 죽음, 그리고 모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영혼에 걸터앉아 노래하는 한 마리 새 같은 희망…이 책에 실린 61편의 영시는 인생사의 희로애락을 다루며 삶과 세상의 보편적인 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 정경심은 이 시집을 통해 많은 이들이 위로받고,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 기쁨과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삶을 관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책머리에 소개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서는 사랑하는 연인을 여름날에 비유한다. 영국에서 여름은 신의 은총에 비할 정도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더 잘 이해되는 구절이다.

시인은 “내 그대를 한여름날에 비할까요?/그대는 더 사랑스럽고 더 온유합니다…/인간이 살아 숨쉬고 그 눈이 세상을 보는 날까지/천년이고 만년이고 나의 시는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라”고 호기 있게 연인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그의 자신감처럼 시는 수백 년이 지나도록 남았고 그의 연인은 ‘여름보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시 속에 살아 있다.

이런 비유는 책에 수록된 모든 작품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그만큼 오래 칭송할 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읽는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성찰의 시간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섬세하게 고른 번역어와 시적인 그림들

저자는 각 시마다 역사적 배경과 시적 상황을 찬찬히 설명하여 시인의 마음과 우리를 이어준다. 더불어 첫사랑의 기억, 아이를 가졌을 때 깊이 생각한 것, 엄청난 시련을 지나며 얻은 결론 등 자신의 이야기도 진솔하게 들려준다. 또한 간간이 출발어와 도착어를 천칭 저울에 올려 미세하게 균형을 맞추듯 표현을 다듬었던 과정도 소개하여 번역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더욱 흥미로운 책이 되었다. 다만, 지면상 몇 편의 시에서 일부 연을 생략한 점은 아쉬웠다.

김석희 화가
김석희 화가

텍스트 외에도 표지 그림 <낮달>부터 본문 사이사이에 캡션 없이 스미듯 들어간 여러 점의 컬러 삽화가 눈길을 끈다. 내지의 경우, 종이의 재질 때문에 인쇄로 원화의 색과 질감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지만 직관적으로 아름다운 색채와 분위기로 시적인 분위기를 돋운다. 삽화를 그린 김석희는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오랜 시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수차례의 개인전 및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깨어 붓을 드는 화가다. <더 칼럼니스트>의 칼럼니스트로 활약중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던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이 ‘희망’을 주제로 쓴 시가 실려 있고, 그중 한 편에서 책의 제목이 나왔다. 한 희망은 계속 기대를 품게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매몰차게 날아가 버리고 다른 희망은 아무리 고난이 깊어도 떠나가지 않고 곁을 지키며 명랑한 노래를 불러준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희망의 새를 만났을까. 이제 어떤 희망을 가까이할 것인가. 큰 고난을 만나 절망에 빠진 저자의 마음을 희망으로 이끌어준 영미시의 숲을 담담히 거닐어보자.

글쓴이

김현경 번역가

김현경 번역가는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일하며 다양한 책을 편집했다. 현재 프리랜서 번역자로 국내 주요 미술관과 기업을 위해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책 형태에 관한 책』 『걸작의 공간』 『그래픽디자인 도서관』 『디자이너, 디자이너 훔쳐보기』 『100권의 디자인 잡지』 『빅게임: 매일의 사물들』 등이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