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리족 어떻게 뉴질랜드에서 살아남았나
[김형진의 걸쭉한 뉴질랜드 이야기] 호주 애보리진, 인디언과는 다른 운명의 길 식인 문화까지 있었던 전투민족 200년 동안 백인들과 싸우며 버텨 1840년 ‘와이탕이 조약’으로 극적인 평화 그 이후 마오리족은 다양한 복지혜택 받아
속정(情)이 깊은 마오리 주민들
저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의 외곽지역에서 시내버스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서울의 1/10 정도 되는 150만 명의 인구가 서울보다 큰 면적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 대도시들의 교통 상황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여유 있는 환경이다보니 버스에 올라타고 내리는 승객들과 인사를 주고 받는 경우가 많은데, 오랫동안 유심히 관찰을 한 결과 인사를 주고 받는 방식이나 태도에 있어서 민족이나 성별에 따라 묘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버스 승객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백인 여성들의 경우, 활짝 웃으면서 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지만 돌아서면서 바로 표정이 싸늘하게 식는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예의범절이나 에티켓이 몸에 밴 백인들은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거의 습관적, 의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이 땅의 주인이었던 ‘마오리’들은 생김새가 아주 투박하고, 인사를 먼저 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버스에 올라타는 마오리 남성 승객에게 인사를 건네면 그 특유의 뚱한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받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저는 그 사람의 형제 자매가 되면서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게 됩니다. 어떤 손님은 긴 인사가 끝난 후에도 자기가 오늘 저녁때 뭘 먹을 계획인지까지 저에게 말해주기도 합니다. 가족중심적이고 대가족이 많은 마오리들은 개인주의적인 백인들에 비해 우리 한국사람들하고 정서적으로도 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식인(食人)의식 있었던 전투민족, 마오리
마오리(Māori)들이 어디에서 기원한 민족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들에게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겨진 기록이 없습니다. 최근 DNA 연구 결과 그들이 중국 남부에서 출발하여 대만, 필리핀, 파푸아 뉴기니 등을 거쳐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들로 흩어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어쨌든 카누를 타고 남태평양을 떠돌던 마오리들이 서기 1200~1300년 즈음에 이 땅을 발견하고 Aotearoa라 이름 붙이고 정착해서 돼지를 키우고 고구마를 재배하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Aotearoa는 마오리 말로 ‘크고 흰 구름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마오리들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전투민족입니다. 골격이 크고 피부가 두껍고 근육이 아주 강합니다. 부족들 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적의 사체를 먹는 의식을 통해 그들의 영혼을 흡수하는 오랜 풍습도 있었습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라는 사람이 호주를 찾아가다 헛발(^^)을 디뎌 이 곳에 와서는 제멋대로 이 땅의 이름을 자신의 고향 질랜드(Zeeland)를 따서 뉴질랜드(New Zealand)라고 붙였습니다. 그 이후 유럽인들이 몰려 들어오자, 마오리 들은 그들을 Pakeha라고 부르며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Pakeha는 마오리말로 ‘흰 돼지’라는 뜻입니다.
뉴질랜드를 정복하고 싶었지만 용맹스러운 마오리 전사들을 두려워했던 영국인들은 마오리들이 부족들 간의 공동체 의식이 희박하다는 것을 이용해 각 부족들에게 당시 최신 병기였던 머스킷 소총을 따로따로 나눠주고 서로 죽이고 죽이라고 이간질을 시킵니다. 머스킷 전쟁과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페스트(뉴질랜드엔 원래 쥐가 살지 않았음) 등의 전염병 창궐로 마오리들 숫자가 크게 줄어들자 영국인들의 작전이 처음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내줬던 머스킷의 총구가 다시 자기네들을 향하게 되면서 마오리와 백인들 간의 길고 긴 전쟁이 시작됩니다.

영국인은 주권을, 마오리는 소유권을
매년 2월 6일은 뉴질랜드의 법정 공휴일인 와이탕이 데이(Waitangi Day)입니다. 이 날은 1840년 2월 6일 뉴질랜드 북섬의 ‘와이탕이’라는 곳에서 식민지 본국인 영국 대표와 토착민 마오리 부족장 대표 간에 뉴질랜드의 주권과 토지 소유권 등에 관해 명시한 와이탕이 조약(The Treaty of Waitangi)이 맺어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조약 문서는 마오리 부족장들이 영국 여왕에게 ‘주권’을 이양하되, 마오리인의 토지와 자원의 소유를 보장하는 것과 마오리 부족 모두 영국 시민과 똑같은 권리와 특혜를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조약은 향후 뉴질랜드의 역사와 헌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 다른 식민지에서 본국과 토착민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방적인 침략에 이은 불평등 조약과는 달리, 식민의 정당성과 토착민의 권리를 상호 인정하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보기 드문 조약으로, 훗날 뉴질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는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마오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조약 자체가 그렇게 평등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조약 자체가 영어로 되어 있었고, 영어와 그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마오리 부족장들은 조약이 담고 있는 내용의 이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약간 불리한 조약이기는 했지만, 침략자들과의 오랜 싸움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땅의 주권은 내어주되 자신들의 재산권은 어느 정도 보존받고, 당시 세계 최고로 발달된 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시스템의 혜택을 볼 수 있었기에 현명한 계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 취급 당하며 학살당해 거의 절멸의 수준까지 되어버린 호주의 애보리진( Aborigine)이나, 자신들의 땅 모두 빼앗기고 보호구역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버린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처지에 비해, 마오리들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와 싸워 굴복하지 않은 유일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백인 다음으로 들어오는 중국·인도인들
물론 이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오는 백인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마오리들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은 계속 이어져 왔고 현재까지 해결이 안된 것도 꽤 있다고 합니다. 이런 갈등이 지속되자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마오리들의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해주고 마오리말을 법적 공용어로 인정해주는 등 여러 가지 회유책을 쓰게 됩니다.
그 이후 점차 백인과 마오리 간의 갈등은 점차 줄어들고, 마오리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소수인 마오리들만을 위한 각종 혜택이나 수당이 많아져서 어떻게 보면 백인에겐 역차별이라고 할 정도의 혜택을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마오리들은 다른 인종들에 비해 크게 노력을 하지 않아도 대학에서 학위를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대기업, 학교, 병원 같은 곳에도 의무적으로 마오리를 일정 비율 채용해야 합니다. 심지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복지수당을 받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마오리들을 ‘우민화’하며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백인들의 큰 그림이라 생각합니다.
800년 전 쯤 마오리가 이 땅에 첫발을 들여놨고, 그 600년쯤 후에 들어온 백인들이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서 주도권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이민이 본격화된 약 30년전부터는 중국과 인도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백인들이 이 나라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중국인들의 자본과 단결력, 인도인들의 머리와 노동력이 이 나라 경제를 조금씩 조금씩 접수해 가고 있는 양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사뭇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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