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청와대 시절에도 민주화는 진전했다

[양평의 시사와 역사 ] 대통령에 구두 던져도 무죄받는 세상인데.. 청와대 지세 보다 미·중·일 외세 신경써야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청와대. 북악산이 북풍을 막아주는 모양새다. 사진= 연합뉴스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청와대. 북악산이 북풍을 막아주는 모양새다. 사진= 연합뉴스

청와대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윤석열 당선자의 확고한 결심으로 이제는 끝이 난 듯하다. 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옥신각신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그것은 필자가 용산이전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것과는 무관한 일이다. 필자는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을 아우르는 ‘대통령궁’의 이전을 경제학이나 도시학 또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평가할만한 안목도 없다. 다만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그 논란은 양측 모두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청와대가 ‘제왕적 대통령’ 상징인가

그것은 청와대 시절에는 대통령이 국민과 더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다시 말하면 민주화가 진전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다.

용산 이전을 주장하는 새 정부 측은 “청와대가 제왕적 권력의 상징으로 조선 총독 때부터 100년 이상 써왔으니” 그곳을 국민께 돌려주고 용산으로 이전하겠다고 주장했고, 반대하는 측은 예산이나 안보 등의 문제 만을 들먹였으니 제왕적 권력의 상징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역사’를 들먹일 것도 없이, 기억만 더듬어 봐도 청와대, 아니 경무대 시절부터 한국의 민주화는 발전해 왔고 그만큼 대통령과 국민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물론 그 ‘거리’란 공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평적 거리보다도 심리적으로 본 수직적 거리에서다.

지난해 대통령에게 구두를 던진 정창옥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보도를 접한 필자는 갑자기 오래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큰 영애’로 불리던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문화행사에 참석한 큰 영애를 한 경호원이 바짝 뒤따라갔는데 등을 영애와 맞대고 뒷걸음으로 걸었다. 뒷걸음으로 걸으면서도 뒤에 눈이 붙은 듯 용케도 영애의 뒤를 잘 따라가는 데다, 행사에 나온 사람들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눈초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대통령도 아닌 그의 딸을 그렇게 경호했던 시절에서 대통령에게 구두를 던지고도 ‘어육(魚肉)’이 되기는커녕 영웅처럼 의기양양하게 기자회견까지 하는 시절이 됐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었다. 옛날의 그 행사에서 영애와 일반인들의 물리적 거리는 대통령에게 구두를 던진 정창옥과 문재인의 거리와 비슷했으리라. 하지만 그 심리적 거리는 하늘과 땅이 아닌가.

역사속 통수권자, 외세에 많은 영향받아

청와대의 지세를 들먹이며 청와대의 ‘제왕적 기운’을 역설하는 주장은 더욱 한심하다. 그들은 왜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풍수 같은 것만을 들먹이며 너무나도 확실한 역사적 사실은 외면하는 것일까.

가까운 역사만 뒤적여 봐도, 조선의 왕은 제왕이 아니어서 ‘제왕’인 중국 황제의 지시서 같은 조칙(詔勅)을 갖고 오는 칙사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의 독립문 자리인 모화관(慕華館)까지 나가서 네 차례나 절하는 사배례(四拜禮)를 하고나서야 칙서를 받는 신분이었다. 따라서 굳이 풍수로 조선의 운기를 살피려면, 청와대 부근 못지않게 연경(燕京:베이징)의 운기까지 살펴야 할 판이다.

그런 시대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아 공화국을 수립한 한국이 다시 그 왕조시대로 회귀하듯 헤매기 시작한 것도 청와대, 아니 경무대의 지세(地勢)와는 무관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했던 시절, 즉 대통령 관저가 경상남도지사 관저였던 시절인 1952년에 일어난 ‘부산 정치파동’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암흑 속을 헤매기 시작한 단초였다.

공교롭게도 그 주인공은 왕가의 사람이랄 수도 있었다. 초대 대통령으로 경무대의 주인공이었던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민주주의의 본바닥인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현대적 지식인의 면모가 혼재된 인물이었다. 미국에서 통용된 그의 호칭도 ‘프린스 리’(Prince Lee)와 ‘닥터 리’의 두 개를 갖추고 있었다.

집권 초기에는 닥터 리의 기가 더 셌으나 점차 프린스 리의 기가 세졌는지 끝내는 정치파동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 정치파동은 이승만이 자신의 실정 때문에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전망이 어둡게 되자, 직선제로 개헌을 추진했으나 개헌안도 부결되자 폭력배 등을 동원하여 개헌과 나아가 재선을 관철한 사건이다. 당시 이승만이 동원한 백골단과 땃벌떼 등 폭력단체의 전통은 20세기 내내 한국 정치를 멍들게 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당시 부산 경무대로 쓰인 경남도지사 관저(현 부산임시수도 기념관)에는 한국이 공화국에서 왕조시대, 아니 폭군시대 같은 흑역사로 휩쓸리게 하는 불길한 운기 같은 것이 숨어있다고 볼만도 하지만, 이번의 그 장황한 논쟁에서 전혀 언급도 되지 않은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승만의 몰락, 아직도 엄연한 ‘외세’ 영향력

그 이승만이 물러나는 과정도 청와대의 풍수를 따지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거리인가를 말해준 것이기도 했다. 1960년 4·19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로 20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이승만은 자유당을 탈당하는 정도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색이었으나 그해 4월26일 월터 매카나기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을 계기로 결국 하야의 길을 택했다.

그 면담을 두고는 이승만이 매카나기와의 면담 전에 하야를 발표했다는 설도 있어 사실관계에 다소 혼선은 있으나, 그 면담이 사실상 미국 정부의 ‘통고’ 같은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중국의 황제가 조선 왕에게 보내는 칙서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는 한국 정치가 청와대 또는 경무대의 지세에 못지않게 워싱턴의 지세도 타는 것을 말해주는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정와대가 제왕적 권력의 상징으로 조선 총독 때부터 100년 이상 써왔으니” 라는 윤석열 당선자의 말을 다른 각도에서 면밀히 살펴야 할 일이다.한국의 대통령은 물론 조선 왕들의 치적을 멍들게 하는 것은 궁전의 지세가 아니라 ‘조선 총독’이 말해주듯 외세에 짓눌린 영향이 크다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청와대의 지세라는 구름잡는 풍수가 아니라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를 두고 ‘극동의 수인(囚人)’이라고 평가했던 서양 정치학자들의 이론을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조선을 ‘극동의 수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조선이 여러 강대세력에 둘러싸여 있어서 줄곧 고래싸움에 새우 등터지는 비극을 겪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인 조선의 비극이었다면 병자호란은 명과 청의 사이에 끼인 조선의 참사였다. 그러다 구한말에는 청나라와 일본의 사이에서,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에서 끼어있다 끝내 먹히고 말았다. 우리가 겪게 된 암담한 세월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조선총독관저는 사라졌으나 그 자리에 대신 미군정청장의 관저가 들어선 것이다.

경제대국과 민주화의 ‘자랑스런 역사’ 기억해야

미 군정청은 사라졌으나 이 ‘극동의 수인’의 나라는 수많은 나라들의 싸움터가 됐고 아직도 한국은 자기네 군대를 지휘할 권한을 외국에 맡기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군정청은 미대사관이라는 다른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곳 수장은 매카나기의 경우처럼 한국 대통령의 거취에 조칙에 가까운 발언도 전한다. 그런 상황은 한국이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하는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면서 희석되고 있을까?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다.

얼마 전부터는 시장경제에 뛰어든 중국의 위세가 커져 오래 전에 사라진 듯하던 ‘모화관’이 새롭게 문을 여는 듯한 모양새다. 그래서 문재인이 너무 중국에 설설 긴다고 온갖 악담을 다 들었지만 앞으로 어떤 대통령도 그 모화관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한국 대통령은 청와대의 운기보다는 한국의 지정학적인 영향을 더 크게 받고 그러다 보니 중국의 사신을 맞아 사배례를 올리는 조선왕처럼 왜소해 보이고 그것이 통치력을 약화시킨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제약을 받으면서도 한국인들의 수준은 올라갔고 그래서 민주화는 진전돼 왔다.바로 청와대의 안가에서 총에 맞아 죽은 대통령이 ‘시해(弑害)’를 당했다고 아직도 유력지들이 보도하는 그 한편에서는, 대통령을 ‘문죄인’ ‘문재앙’ ‘삶은 소대가리’ 등으로 부를 수 있으니, 대통령이 굳이 광화문에 나앉지 않아도 국민과 가까워진 셈이 아닌가.

글쓴이

양평 칼럼니스트

칼럼니스트 양평은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 서울경제신문 부국장 겸 문화부장을 역임했으며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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