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사후 한일관계, 무엇부터 해야할까
[최경원의 이웃 일본 바로보기] 양국관계, 한 지도자의 전유물 아냐 아베 이후라도 큰 변화 없을 것 ‘중재위원회 설치’부터 시도하자
한일은 왜 상대국 지도자 탓만 할까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2019년 여름 일본에서는 ‘문재인만 아니었다면’ 한일관계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 않았을 거라는 인식이 강했다.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중시하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아베만 없다면’ 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 수정주의적 발언에 더해 반도체 관련 소재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여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조치를 단행한 아베 총리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한국이나 일본 어디에서도 ‘트럼프만 아니었다면’ 이라는 식의 말은 쉽게 하지 않았다. 누가 미국의 리더가 되더라도 새로운 리더의 정책에 대응하면서 외교적 접점을 찾으려 한다. 그런데 왜 유독 한일 관계에 있어서는 ‘문재인만 아니었다면’, ‘아베만 없다면’ 이라는 말들이 쉽게 나오는 걸까. 양국 관계를 정치 지도자 한 두사람의 전유물로 여기고 한일관계 만큼은 자신들의 ‘정의’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상대방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 볼 일이다.
아베 전총리 사망으로 변화가 올까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한일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의 존재감을 생각할 때 이런 기대가 허황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일관계가 누구 한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상황일까. 일본 여론은 아베 전 총리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한국’이라는 프레임의 영향으로 강경하게 변해 버렸다. 게다가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례적으로 아베 전 총리의 국장(国葬)을 결정했다. 일단은 아베 전 총리의 치적을 강조하여 그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한편, 한국의 여론은 역사문제에 대해 일본에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지난 5월말 한국일보와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실시한 공동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81%(일본인은 58%)가 역사문제에 대해 상대방에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 말기인 2021년 조사보다 높은 수치이다.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윤석열 정부가 졸속으로 일본에 양보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여론이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또 난관에 부딪힌 윤석열 정부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외교분야 중요 공약의 하나로 한일관계 개선을 들었다. 취임 전에 이미 일본에 정책협의단을 파견했고, 7월4일에는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민관합동회의를 출범시켰다.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한일관계의 근간을 흔들었으니 한국이 해결책을 가져 오라는 일본측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측은 이러한 노력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앞서 일본측에 설명하고 한일 정상회담을 타진했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노력하고 있으니 일본 정부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NATO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민관합동회의를 발족시키는 정도로는 일본측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민관합동회의에서 정부는 강제 징용 판결과 관련되어 있는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를 막을 대안으로 한일 기업의 자발적 출연으로 조성한 300억 원 기금으로 대위변제를 하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강제 동원 피해자측은 정부에 일본의 해당 기업과 직접 협상이 성사되도록 외교적 노력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외교부가 민관합동회의를 통해 사전에 내정한 안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만을 갖추려고 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제2회 회의에는 일부 피해자들이 불참을 선언했다.
민관합동회의를 통해 국내에서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일본측과의 교섭에 임하려는 정부의 계획은 현재로서는 실현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는 동시에 일본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해야 하는 한국 정부로서는 고민이 깊을 것이다. 만일 윤석열 정부가 일본 정부가 원하는 수준의 대답을 내놓기 위해 피해자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양보안을 낸다면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게 될 것이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7월 18일 현재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은 34.4%까지 떨어졌다(리얼미터 7월 11-15일 조사). 이러한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한국측의 양보를 전제로 한 한일관계 개선을 시도한다면 아마도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과 일본이 각각 국내의 여론을 설득하면서 외교적 타협을 통해 강제 징용 문제의 해결을 보는 것은 이미 기대하기 힘든 상황까지 온 것이 아닐까. 한국 정부가 노력하면 일본 정부가 그에 상응하여 함께 노력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한일 관계 악화의 본질 들여다보자
그렇다면 문제해결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문제가 꼬여서 해결하기 어려울수록 그 본질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강제 징용 판결은 한국과 일본간에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국이 맺은 조약에 대한 서로의 해석이 대립하고 병존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교섭해야 한다. 청구권 협정 3조는 해석의 차이가 발생했을 때 외교 경로를 통해 협의하도록 하고 있고, 외교 경로를 통해 해결하지 못했을 경우 중재위원회에 회부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삼권분립을 내세워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중시했다. 박근혜 정부 시기의 사법농단을 생각하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놓친 게 있다. 대법원 판결로 한일 양국이 합의했던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겼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다. 외교 교섭으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했다면 절차에 따라 중재위원회를 설치해야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중재위원회의 설치를 원하는 일본 정부의 요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중시한 나머지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이는 조건부로 중재위원회 구성에 응할 수 있다는 입장을 일본측에 전달했다. 이런 조건부 제안을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선 정권의 아쉬운 중재委 설치 노력
문재인 정부가 사법의 판단을 중시해 해당 일본 기업의 한국 자산의 현금화라는 법적 절차를 용인하는 입장이었기에 청구권 협정이 정하고 있는 중재위원회라는 절차를 통해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것, 즉 국제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만일 중재위원회가 설치되어 중재안이 도출되었다면 법적인 절차에 따른 일관성 있는 대응이라는 설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 중재안이 대법원 판결을 완벽하게 이행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강제 징용 피해자측과 국내 여론을 설득하는 것도 수월했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2011년 이명박 정부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일본측과의 외교 교섭이 실패로 끝나자 중재위원회의 설치를 일본측에 제안했던 적이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인해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하면서 한국의 중재위원회 설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2015년에 한일위안부 합의를 통해 문제해결을 시도했지만, 피해자들과 여론의 완전한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윤석열 정부, 양보 대신 ‘중재’를 택하길
지금 이 단계에서 윤석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여론의 우려를 무릅쓰고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양보안을 찾는 것이 아닐 것이다. 먼저 문제의 성격이 한일관계의 근간을 형성해 왔던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한 것임을 명확히 규정하고, 청구권 협정에 따라 중재위원회를 설치하여 중재안을 도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해야 한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에서 삼권분립과 피해자 중심주의 속에서 실종된 대일 외교를 회복시키는 길이다.
이렇게 한다면 일본 정부가 원하는 수준의 해결책을 한국 정부가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법의 판단으로 시작된 청구권 해석의 불일치에 대해 법적 절차에 따라 일관성 있게 문제해결을 꾀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외교적인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일본측의 요구에 쉽게 양보할 것이라는 여론의 의심을 불식시키는 이득도 기대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하고 두 달이 조금 지났다. 합리적인 이유가 전제된다면 전 정부의 정책에 대한 평가와 전환이 가능한 시기이다. 이러한 정권 교체가 갖는 이점을 최대한 살려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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