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은 제주 4·3
[제주출신 한경희 시인의 가족 이야기] 둘째 증조할아버지 가족들 경찰에 총살 무장대든 경찰이든 마을마다 가족 몰살 반공 이데올로기에 제주 전체가 피해자 “4·3은 국가가 저지른 제노사이드의 역사”
무자년(1948년) 제주 4·3이 일어나고 정부는 한라산에 입산한 무장세력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해안가로부터 5km 이상 마을의 소개령을 내린다. 그곳에 머무는 자는 산사람이나 산사람의 협조자로 간주하여 사살, 구금, 강제 소개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미군정청, 1948년 8월에 수립된 이승만 단독정부의 묵인, 방조, 명령하에 진행된 군·경·서북청년단의 무지막지한 토벌과 한라산 무장세력의 저항으로 온 섬이 살육의 도가니가 된다. 이승만은 제주도를 불태워도 된다고 했고, 이때의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닌 반공을 위한 본보기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1954년 9월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끝난다. 요즘 입산객의 발걸음에 몸살 하는 한라산을 그 시기엔 그 누구도 오를 수 없었다.
할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4·3을 겪으셨다. 낮엔 군경이 수색하고 밤엔 산 사람이 내려와 젊은 남자들에게 입산을 권유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노랑 개(군경) 왐쪄.”
“검은 개(한라산 무장대) 왐쪄.”
하고 외치면 할아버지는 나무 위에 숨고 할머닌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와 바닷가 바위틈에 아이들을 데리고 숨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호야등불 아래서 바느질하시며 들려주시던 그 얘기엔, 군경은 두려운 대상이고 산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뭔지 모를 공포의 동물 같았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이데올로기는 없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어서 무기력하게 당하고 살아남은 것이었다. 이웃의 무장대 가족, 경찰 가족이 어느 날 돌아가며 몰살당한 이야기가 너무 참혹해 믿어지지 않았다.
4·3 당시 아버지는 13살이었다. 집에 동갑내기 소가 있었는데 냇가에 물 먹이러 갔다가 소 발굽에 발등을 밟혀 생긴 흉터를 추억으로 갖고 계셨다. 언제 누구에게 뺏길지 모르는 소를 어느 날 증조할아버지가 잡으셨단다. 아버진 눈물만 뚝뚝 흘리며 그 고기를 먹지 않으셨단다. 밤이 깊어 누군가
“한주사 어른 있수꽈?”
해서 문을 여니 산 사람 둘이 서 있었단다.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그들을 고기를 먹이고 쪽잠을 재우고 다음 날 ‘자수하겠다’ 하여 인근 지서에 데려다 주며 해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저녁 무렵에 멀리 소나무 숲에서 총소리가 들리더란다. 증조할아버진 털썩 주저앉으시며 다시 산으로 올려보낼 걸 괜한 짓을 했다고 자책하셨더란다.
증조할아버지는 형제가 셋이셨다. 맏이였던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유학하시던 분이라 글만 읽으셨고 남원 인근 마을에서 “한주사”로 불리며 존경받던 분이었다. 둘째 증조할아버지(이후 샛할아버지로 표기)는 공부는 싫고 이재에 밝으셔서 근면하게 일만 하셨고, 셋째 증조할아버지는 신식 공부만 하는 분이 마을의 구장을 하셨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집 큰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 둘째 증조할아버지댁 아드님이 일본으로 유학 가셨다. 우리 집 큰할아버지는 일본에 자리 잡고 돌아오지 않으셨고 우리 할아버지는 광복 후 일본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골 상자와 그곳에서 낳은 딸의 손을 잡고 귀국하셨다. 둘째 증조할아버지 아드님은 귀국 후 입산해서 그즈음 표현대로 산 폭도가 되었다. 그 당시의 지식인이 거의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될 때니 세 사촌 형제 중 어쩌면 가장 충실히 공부하셨던 셈이다.
어쨌거나 둘째 증조할아버지 아드님은 한라산에서 행불자가 되었고 무장대 가족이라고 고초당하다 둘째 증조할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한라산으로 피신하셨고 남겨진 가족들은 딸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4·3의 상황이 끝나고 산에서 내려와 자수하신 둘째 증조할아버진 살아남은 딸과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마련해준 집에서 지내시며 재혼하시고 타고난 근면함으로 인근에서 소문난 부자가 되셨다. 유난히 남자 명(命)이 짧은 집안에 둘째 증조할아버지는 장수하셔서 오랫동안 문중의 기둥 역할을 하셨다. 대머리에 하얀 수염을 늘어뜨리고 간편하게 지은 한복을 입고 다니시던 그분은 아버지에게도, 삼촌들에게도, 내게도 “샛할아버지”(제주도에선 둘째를 샛이라 칭한다) 셨고 집안의 든든한 후원자셨다.
4·3의 희생자에 대해 입도 뻥긋 못하고 수시로 마을 지서에서 감시하고 연좌제에 묶여 있던 때라 둘째 증조할아버진 혹시 당신 아들의 일로 방계가족 조카, 손자들이 피해당할까 노심초사하셨다. 그렇게 사시던 둘째 증조할아버지의 인생은 끝까지 편치 않으셨다. 재혼하여 늦게 본 아들이 30대에 신장병에 걸려 그 많은 전답을 병구완에 팔아 쓰시고 1980년대 초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나도 나이가 들어 돌아보니 참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다.

아주 오랫동안 제주도에서 4·3은 금기어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마을에서 살고 한 집안에서 함께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형제가 서로 총부리와 죽창을 겨누기도 했다. 그 일이 국가 권력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이고 제주도 전체가 피해자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확인 받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며칠 전 이 섬은 다시 4·3 75주년 추념일을 넘겼다. 선거가 가까울 때만 와서 읍소하는 정치인과 더불어 불경스러운 현수막과 함께 “서북청년단”이란 시대에 뒤떨어진 무뢰배들이 와서 “빨갱이” 운운하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고 갔다.
4·3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특정 지역의 국민을 이데올로기로 묶고 양민을 학살한 제노사이드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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