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1980년 6월 3일...죽음을 예정한 날

1980년 6월3일 세운상가 ‘무장봉기’ 계획 광주에서 결사대가 총 500정 갖고 오고 대학생들은 부엌칼, 과도, 몽둥이 들고 공수부대에 죽음 각오하고 맞서려 했는데...

1980년이후 민주화 시위는 서울 뿐아니라 전국에서 이뤄졌고 1987년 6.10항쟁에서 열매를 맺었다. 그 사이 박종철 열사 등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1980년이후 민주화 시위는 서울 뿐아니라 전국에서 이뤄졌고 1987년 6.10항쟁에서 열매를 맺었다. 그 사이 박종철 열사 등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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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역 회군’의 5월 15일

1980년 5월 15일은 그 유명한 ‘서울역 10만 시위’의 날이자, 또한 ‘서울역 회군’으로 유명한 날이다. 그날 저녁에 서울역 앞에서 남대문에 걸쳐 10만명의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집결했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전 서울에서 열린 최후의 대규모 저항 시위였다..

그곳에 모인 대다수 학생들은 10만 명의 기세를 모아서 광화문~청와대로 진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심재철·유시민 등이 이끄는 서울대 총학생회 지도부는 ‘회군’을 결정했다. 그래서 그후 두고 두고 욕을 먹었다.

아무튼 그날 오후에 필자는 관악캠퍼스 안 서클룸(동아리방)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같은 건물 위층에 있는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도움’을 요청해왔다. 시위를 위한 플카드를 만드는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일을 돕고 있는 중, 총학생회에 수시로 시민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그 내용은 “지금 수많은 탱크가 망우리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용산의 효창운동장에 지금 공수부대원들이 진입하여 주둔하고 있다. 그곳에서 매일 시위진압 훈련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서울역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등등.

1980년 5월15일오후 서울역 광장 주변에 모인 대학생과 직장인. 10만명은 족히 넘는 시위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서울의 봄'을 기대했다.
1980년 5월15일오후 서울역 광장 주변에 모인 대학생과 직장인. 10만명은 족히 넘는 시위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서울의 봄’을 기대했다.

작년인 2023년 11월 9일에 인재근 국회의원실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에서 공동 주최하고 오세재 박사가 발표하며 김명인, 이선근, 최민 등이 토론한 세미나에서 새로 밝혀진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당시의 시민제보는 실은 국군보안사(사령관은 전두환이다) 요원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공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학생회 간부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심재철 등 서울역 회군 결정 당사자들은 전두환 측의 심리전 공작에 고스란히 넘어간 거로 추정된다.

겨우 대학 2학년이었던 필자는 서울역 앞 시위에 기껏해야 경찰의 최루탄 대응 정도 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군인들, 거기다 공수부대가 데모를 진압한다니! 게다가 탱크와 장갑차가 우리에게 총격을 가할 거라니! 기가 막혔다.

플래카드 준비를 마치고 그 물품들을 들고 버스로 서울역을 향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서울역으로 가도 되는 걸까? 그냥 나 혼자 슬며시 도망쳐 버릴까”

겨우 용기를 내서 서울역 앞으로 갔다. 그런데 웬 걸? 서울역 앞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서울역 남쪽에서 남대문까지 데모 시위대가 가득차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위협’과 ‘공포’의 분위기는 없었다. 지난 2016년 겨울의 촛불시위 때처럼.

그곳에 모인 대학생들은 “효창운동장에 집결한 공수부대”(효창운동장에서 서울역은 군트럭으로 10분 거리다), “망우리를 넘는 탱크”에 관한 이야기 따위는 들은 적이 없는 것으로 보였고, 우리 모두 ‘축제 분위기’같은 기운에 휩쓸렸다.

밤이 되자 남대문 근처에서 시위대 중 누군가가 버스를 몰고 경찰 진압대에 진격하는 바람에 경찰 몇 명이 죽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서울역~남대문 큰 거리에서 뒷골목으로 잘못 들어가면 그곳에 잠복한 경찰과 형사들에게 갑자기 체포돼 끌려갈 터이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밤 11시~12시가 되자, 여기저기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불안섞인 문의가 쏟아졌다. 이대로 여기서 밤을 샐 것인지, 광화문~청와대로 진격할 것인지, 아니면 각 대학교로 복귀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서울역 앞의 어느 곳에서 모인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에서 “학교로 회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이야기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아 다행이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아니구나”고 마음 속으로 안도하기도 했다.

5월16일, 그리고 5월 17일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 어두운 밤에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관악산옆 서울대 캠퍼스까지 남영동과 노량진, 봉천동 고개를 넘어 2시간 넘게 걸어서 왔다. 하지만 어두운 거리를 걸으며 마음이 찜찜했다. “이렇게 캠퍼스로 돌아가면, 그래도 되는 건가? 전두환이 곧 계엄령을 확대하고 공수부대를 서울에 진주시킬 것 같은데, 그러면 심재철,유시민 등은 거기에 맞서 싸우겠다는 건가? 어떻게?”

관악산의 서울대 캠퍼스 안에 돌아온 수천 명은 여기저기 흩어져 밤을 웠다. 정확히 말해 거의 잠을 못잤다. 대학 캠퍼스 안에 침대와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니, 잠 잘 곳이 없었다. 다음 날인 5월 16일의 아침 식사는 학교 식당에서 공짜로 제공했다. 점심 때는 캠퍼스 중앙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집회를 가졌다. 나머지 시간엔 여기저기 흩어져 낮잠을 자거나 쉬었다. 지치고 피곤하니 더 이상 뭘 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 피곤함과 지친 대학 분위기를 노렸던 모양이다. 그날 밤 12시, 즉 5월17일 새벽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계엄령 확대’와 함께 공수부대 병력을 서울대를 비롯한 모든 캠퍼스에 기습적으로 진주시켰다. 계엄군 병력이 관악 캠퍼스에 진주할 때 그것에 맞서는 학생들은 (총학생회의 ‘강력한 저항’ 호언에도 불구하고)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5월 16일 저녁에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그날 저녁에 서클 사람들과 신림동 녹두집에 모여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이야기 나누는 데 뭔가 찜찜하고 불길한 분위기가 모두의 마음을 짓눌렀다. 밖에 나오니 캄캄한 밤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비를 맞으며 무기력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터벅터벅 동네 자취방을 향해 귀가하던 그 밤거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공수부대가 캠퍼스에 진주한 5월 17일 아침, 신림동 자취방에서 일어나니 라디오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모든 대학이 휴교했다고 한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걸어서 10분 거리의 서울대학교 정문 근처에 가서 멀리서 동정을 살펴보니 탱크 한 대가 교문 앞에 떡 하니 서 있고, 공수부대 군인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날 새벽, 서울대 관악산 기숙사에 지내던 수백명 기숙사생들은 새벽에 급작스레 방에 들이닥친 공수부대원들에게 쇠몽둥이로 두들겨 맞으며(그래서 몇몇 학생들은 다리, 팔이 부러졌다) 운동장에 집합한 후 강제로 기숙사에서 쫒겨났다.

그날 오후에 자취방 뒷산(관악산 건너 삼성산)의 능선에 올라가서 서울대 교정을 살펴보니, 학교 안에 아무도 없었고, 총을 든 군인들만 간혹 왔다갔다 했다. 우리는(필자의 서클 동기이자 자취방 동기인 A군, 그리고 늘 함께 자취방에서 밥해 먹으며 어울리던 B군 등) 혹시나 학교 교정의 공수부대원들이 산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총을 쏠까봐 능선 위에서 머리를 숙이고 조심스레 학교를 바라볼 뿐이었다.

휴교령과 계엄령이 떨어질 경우, 모든 학생들은 총학생회에서 미리 준비한 비상연락망의 연락지시사항을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즉, 계엄령에 저항하는 시위 준비를 지칭했다. 그런데 아무 연락이 없었다. 심재철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시민 당시 서울대총학생회 대의원대회의장 등이 모두 체포되었거나, 모두 나 살려라 도망다니느라 총학생회 비상연락망이 와해된 것으로 보였다.

친구들(고전연구회 79학번 동기들)은 “에이, 학교가 문 닫았으니 우리 어디 놀러나 가자”고 해서 A군 동기의 고향 집(충북 증평) 시골 농촌에 가서 2, 3일 동안 쉬며놀며 보냈다. 그 다음에는 C군의 고향집(충남 강경) 시골 농촌에 가서 2, 3일 놀았다. 그렇게 강경에서 지내고 있을 때 “전남~광주로 향하는 도로가 모두 차단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경 바로 남쪽이 전라북도였다. 뭔가 이상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위대를 진압하겠다며 탱크를 앞세우고 시가지로 나선 경찰과 군인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위대를 진압하겠다며 탱크를 앞세우고 시가지로 나선 경찰과 군인들..

광주가 진압된 5월 27일, 그리고 5월 28일 사발통문

5월 24일 경에 서울로 올라와서 77학번 선배에게 혹시 그동안 뭐가 어떻게 돌아갔었는지 전화로 물으니, 광주에서 대학살이 진행되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임산부가 칼에 찔려 죽는 등 수천 명이 죽었다고 전화로 말한다.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신문과 뉴스에서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짧게 보도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5월 27일, 방송에서 광주사태가 진압되었고 폭도들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 다음 날인 5월 28일 대낮에 79학번 동기들 10명 가량이 신림동 자취방에 모였다(왜, 어쩌다 모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비상연락망을 통해 총학생회 등으로부터 지시사항이나 사발통문이 전달되었던 거 같다. 누가 지시한 건지, 그 최종 책임자가 누군지 지금도 모르지만, 그 내용은 이랬다.

1. 6월 3일 오후 3시에 서울 종로3가 세운상가 앞에서 계엄령과 광주학살에 맞서는 시위를 시작한다.

2.. 그날, 광주에서 미반납된 총(구식 카빈 소총으로 광주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것을 말함)을 소지한 우리측 결사대 5백명(광주에서 올라올)이 나올 것이다.

3. 공수부대는 기관총과 탱크와 총검으로 우리를 진압할 것이고, 양측 간에 총격전이 벌어질 것이니, 총을 갖지 못한 우리들 같은 자들은 최소한의 자기 무장을 하라. 즉 부엌칼, 과도, 몽둥이(빨래방망이) 같은 무기라도 최소한 지참하고 나오라.

이미 방송과 신문에서는 “광주 폭도들의 무장폭동을 군대가 진압했으며, 그렇지만 2천정의 소총이 미수습 상태”라고 하면서, 자진해서 총을 반납하고 자수하는 자들에겐 자비가 베풀어질 것이라는 해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가올 6월 3일 세운상가 앞에서 일어날 데모 관련한 비상연락망 지시의 핵심은 ‘5백정의 미반납 소총을 가진 우리측 결사대-광주에서 올라온다는-가 정말로 나올 것이냐 여부였는데, 방송에서는 이미 ‘2천 정의 카빈 소총이 미반납 상태’라고 하고 있으니, 정말로 우리는 그것을 믿었다. 또는 믿고 싶었다.

예정된 죽음, 비겁해지지 않은 마음

문제는 구식 카빈 소총 하나 가진 것 없는 ‘우리들’이었다. 저들은 자동소총과 기관총으로 우리를 쏠텐데, 우리는 기껏 부엌칼과 과도로 맞서 싸우라고? 하.... 하늘이 노랗다는 걸 실제 느꼈다. “제발 우리도, 나도, 총 한번 쏘며 싸우다 죽고 싶다”는 간절한 심정이 마음 한 구석에 다들 있었다. “나에게도 총을 달라”는 ‘애타는 심정’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지만 마음 속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도 되는 거야?”, “내 나이 겨우 만 19살인데,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가 꿈’이던 내가, 순식간에 전혀 승산 없는 전투에서 무참히 죽어가도 되는 거야?”라는 절망의 목소리가 문득 문득 속삭였다. 1990년대에 나온 개그맨 전유성의 책 제목대로 ‘조금만 비겁하면’ 되는 건데,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거운’ 건데 그게 쉽지 않았다, 젠장.

사실상 나의 죽음이 6일 뒤로 예정되었다. 5월 28일에 그 사발통문을 전해들은 순간부터 밥이 먹히지 않았고 몸에 힘이 빠져 버렸다. 사형선고에 사형집행 날짜까지 받은 자의 몸과 마음이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노랗다”고 하는데 정말로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죽음을 앞둔 공포감은 몸과 뇌를 마비시켜 정말로 하늘이 노랗게 보이게 만들었다.

간단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었다. 6월 3일 세운상가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무슨 명령받는 군인도 아니고, 오직 나의 자발성과 양심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 놈의 ‘양심’이 문제였다. “광주에서는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는데, 너는 겨우 네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세운상가 앞 시위를 피해? 부끄러운 줄 알아라”는 양심의 소리가 계속 내 마음에서 꿈틀거렸다.

5월 28일부터 6월 3일까지 7일간 동안 나의 마음은 노랗게 움추려들었고 겨우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1976년 서울 명동거리 풍경.
1976년 서울 명동거리 풍경.

결국 6월3일....그리고 나는 살아있다

마침내 6월 3일이 되었다. 친구들 4명이 함께 모여 오후 1시부터 버스로 움직였다. 4명 이상이 모이면 무조건 ‘불법집회시위’로 간주해 체포·구금된다는 계엄령 포고문이 배포된 상황이었다. 세운상가 근처에는 짭새(경찰)들이 온통 깔려 있을 것이 틀림없으니, 오후 2시에 시청 근처에서 버스를 내렸다.

이미 그 ‘무장봉기’(?) 계획이 경찰에 입수되었는지, 시청과 종로1가, 2가 인근에 온통 형사들 투성이었다. 형사들은 20대로 보이는 청년들을 수시로 검문하면서 몸수색을 했다.

나는 애초엔 비상연락망을 통해 전해들은 대로 부엌칼, 과도와 몽둥이를 몸에 지참하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끔찍해서” 부엌칼, 과도를 품안에 둘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내가 칼로 찌른다고? 그를 죽인다고? 아이고 하느님....

나는 아무 무장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형사들의 검문도 겁낼 게 없었다. 그 대신에 오후 3시에 예정된 세운상가 앞 무장시위, 즉 무장봉기가 시작되면 나는 죽은 목숨이었다. 방어할 게 없었으니.

대량 학살이, 나의 죽음이, 예정된 세운상가 앞으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그날 종로의 하늘빛은 어찌나 푸르렀던지, 포플러 가로수잎들은 어찌나 싱그러웠던지. 정말, 죽기엔 아까운 날이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저 아름다운 하늘을, 푸른 자연을 더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양심’이란 놈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양심이란, 그 고약한 녀석은 나를 죽음의 세운상가 앞으로 계속 걷게 했다.

종로2가의 종각~YMCA 앞을 걸어갈 때, 군용트럭 10여대가 지나갔다. 그 트럭들 위에는 착검한 소총을 들고 차렷자세로 도열한 공수부대 장병들이 가득 앉아있었다. 세운상가 시위를 겨냥한, 계엄사측의 명백한 ‘무력시위’였다. “너희들 광주에서처럼 무참하게 죽기 싫으면 덤비지 마”하는 신호였다.

우리 네 명이 흩어진 것은 이미 시청앞에서 버스에 하차했을 때부터였다. 형사들의 검문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홀로 걸어서 종로3가, 드디어 세운상가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오후 3시, 세운상가 앞, 썰렁하다. 유시민도, 심재철도, 지휘부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세운상가 2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다. 하물며 경찰과 형사들도 거기에 없었다. “이게 뭐지?”

나는 지금도 그날 6월 3일의 서울 세운상가 무장시위·무장봉기 계획을 누가 기획·조직했는지, 누가 비상연락망을 통해 연락했는지 알지 못한다. 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수집하는 ‘민주화운동사’에 기록되어 있는지 여부조차 모른다.

하지만 그날 오후 3시 세운상가 앞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한 순간, 나에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내 목숨을 건졌다. 부끄럽게도. 억울하게 죽어간 광주의 영령들에게 너무 너무 부끄럽게도...”

그런데 동시에 이 또한 분명했다 “나는 내 목숨을 건졌다. 고맙게도, 너무 너무 고맙게도...” 그래서, 그날 세운상가에 나타나지 않은 ‘유시민’에게 한편으로는 욕을 퍼부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감사한다.

6월 3일 그 이후에

그 6월 3일 이후 나는 최종적으로 마음을 굳혔다. 학업을 중단하고, 나의 목숨, 인생을 다 바쳐 군사독재와 맞서 싸운다. 나는 수천의 광주 영령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심대로 1980년대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주 다행히도-여러 차례 요행과 천우신조가 겹쳐서-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그리고 그때 그 결심은 지금까지 그대로 나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해 5월 28일 신림동 자취방에서 6월 3일 세운상가 무장시위-무장봉기(?) 계획을 전해받고 종로에 나갔던 나의 친구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들은 그 이후 나와 대동소이한 삶을 살았다. 지금도 나의 절친들이다.

P.S. 2018년에 확인된 것들

1980년 6월 3일 오후 3시 서울 종로 3가 세운상가 앞 광주학살 항의 시위 계획이 무산된 것과 관련해 2018년 5월 20일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그 5월 27일 광주 시내에 계엄군 사단 병력이 진입하고 전남도청이 무력 점령됨으로써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었으며 그후 한동안 공수특전대가 무등산 등지에서 작전을 전개했다는 새로운 소식이다.

그래서 혹시 6월 3일 세운상가 무장봉기 시도(?) 사건과 그 시기의 공수부대 무등산 작전이 어떤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그 해 5월 28일에 도피중인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이 6월3일 세운상가 시위에 대해 사발통문을 돌릴 때만 하더라도 실제로 광주에서 미반납 소총을 숨긴 일단의 숨어 지내는 결사대 인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실제로 6월 3일 서울 세운상가에서 그 총들을 반입하여 무장봉기에 나서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를 알아낸 계엄사, 국군보안사 측에서 그들을 필사적으로 찾아내어 체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6월 3일 오후3시 서울 세운상가 앞에서의 무장 시위는 좌절될 수 밖에 없었다는 나름의 추측이다.

혹시 이런 이야기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정리한 5.18 관련 역사 기록에 이미 상당 부분 실려 있을까. 그 쪽 자료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큐 작가 등이 한번 그 당시의 역사 자료와 인물들의 기억을 뒤져서 6월 3일을 전후하여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5.27 광주 진압, 그 이후>라는 테마로.

글쓴이

정승일 '쾌도난마 한국경제' 공동저자

필자인 정승일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다녔으나 과학철학에 대한 흥미로 철학동아리에 참여하면서 플라톤과 니체, 헤겔과 마르크스, 공자와 장자 등의 철학을 접했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항쟁 이후부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서 정치경제학을 독학했다. 1991년 독일로 유학하여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1997년 한국의 외환금융위기와 그에 이은 무분별한 은행-대기업 해외매각과 민영화, 주주자본주의화, 금융시장 완전개방 등 한국에서 진행된 ‘시장 혁명’을 시종일관 비판하였으며 그 경험과 견해를 담아 2005년 장하준 교수와 함께 『쾌도난마 한국 경제』를 출간했다. 또한 2004년 영국에서 펴낸 Crisis and Restructuring in East Asia(Macmillan)에서 1997년 외환금융위기의 원인 분석과 그 이후의 대처 방향에 대한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의 견해를 비판했다. 또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장하준 ·이종태 공저, 2012), 『굿바이 근혜노믹스_정승일의 단도직입 경제민주화』(2013), 『누가 가짜 경제민주화를 말하는가』(2017)에서 기존의 경제민주화론과 재벌개혁론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민주화론과 복지국가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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