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데도 우리는 사랑이 가능할까....
- 외면했던 아픔과의 조우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였던 제자의 연락으로 보게 된 영화 《가능한 사랑》을 통해, 과거 자신의 삶에 짓눌려 타인의 고통을 평면적 프레임 속에 가두어 두었던 부끄러움을 되돌아봅니다.
- 예술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찰 카메라라는 시선을 통해 해고 노동자의 상처와 삶에 개입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의 모습을 통해, 예술이 과연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 치유와 연대를 향한 가능성 비록 상처와 균열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달빛 아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의 마음을 포개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삶에도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 가능할지 깊은 여운을 품게 됩니다.
- 필자 약력
- 2001년 경향신문사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어떤 갠 날’이 당선되었다. 창작집 <고양이소녀>, <꽃>, <구름해석전문가>,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 <눈보라> 등이 있으며, 산문집 <무정에세이>, <가장 사적인 평범>이 있다. 영어를 우리말로 옮긴 80여 종의 책을 출간했다.
‘쌍차’를 다룬 영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선생님, 영화 <가능한 사랑> 보셨어요? 쌍차를 다룬 거라던데요.’
2017년 즈음 경향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인문학 강좌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의 수강생이 보낸 것이었다. 그해 수강생들이 첫 과제로 써낸 글을 읽으면서 자동차 만드는 일을 하다가 해고에 직면해서 파업에 참여했던 당사자가 수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하면서 표현력이 좋아 전달이 잘 되는 문장을 쓰는 사람이었다.
글의 주된 내용은 긴 파업이 실패로 끝난 뒤 동료들이 연이어 병들고 죽어갈 때 경험한 일들이었다. 읽고 있노라면 저절로 숙연해지는 글이었다. 첨삭 수업을 할 때, 강의실에 앉아 있던 어떤 이가 말했을 정도였다.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이 여기 왜 오신 거죠?”
솔직히 그이의 글을 읽기 전에 나는, 흔히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라고 불리는 일련의 일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물론 사회적 파장이 워낙 크던 일이라서 당시의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뉴스로 자주 관련 내용을 접했고, 몇 년 뒤에는 흔히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개정안 제정의 계기가 된 손해배상 판결 소식을 듣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 해의 불규칙한 소득이 대기업 노동자 연봉의 1/4나 될까 말까 하던 나는, ‘내 코가 석 자’인 상태라서 누굴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변명일 것이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개개인의 세밀한 사연은 생략한 채, 어느 한 부분만 확대한 평면적 프레임 속에 상황을 집어넣고 보고 있던 거다. 그래야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테니까.
향 냄새 끊어지지 않는 사람
그해 수업에서 그이가 써오는 글들을 읽으며 깨달았다. 평소에 나 자신이 단순히 가난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게 부당하게 느껴지던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해고 노동자’ ‘불법 폭력 파업 참가자’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어제까지 서로를 형과 동생으로 부르며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뉘고 더 나아가 ‘빨갱이’로까지 분류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상세한 사연을 알고 나니, 새삼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야 했을까. 왜 죽음까지 선택해야 했을까. 해고자와 그들 가족 중에는 스스로 세상을 버린 이들이 많았고, 돌연사 같은 질병으로 떠난 이들도 있었다. 나는 해고 노동자인 그이에게 취재에 응해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이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문자를 받고, 다음 날 영화를 보러 갔다. 상을 받았다는 소식 때문인지, 영화가 좋다는 입소문 때문인지, 관객이 많았다. 동료의 빈소에 조문 가려고 대문을 나서는 한 남자와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나도 모르게 스크린 속 자동차 앞면에 붙은 엠블럼을 확인한다. 쌍용차 로고다.
‘하도 조문을 다녀서 양복에서 향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수년 전 보았던 문장이 떠올랐다.

영화 속 주연들이 상징하는 역할
첫 장면에 등장한 가족은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 분)과 아내 미옥(전도연 분) 그리고 아들 철이다. 호석은 대량 해고와 실패한 파업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다. 미옥은 지금 어떤 옷을 입을지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지가 중요하다고 스스로 설명하는 솔직한 사람이다. 아들 철은 조용한 아이다. 늘 똑같은 과자를 먹고 있고, 늘 입던 옷이 아니면 불편하며, 늘 똑같은 말로 인사한다.
영화는 이들 가족의 일상을 따라가지만, 그 흐름을 주도하는 건 다큐멘터리 감독인 예지(조여정 분)다. ‘사라져가는 노동’이라는 주제로 다큐를 찍겠다는 예지의 적극적 개입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예지의 남편 상우(조인성 분)는 부자이다.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별로 하는 일이 없다. 아내를 돕기 위해 인터뷰이를 대신 데리러 오기도 하고, 호석의 가족과 저녁을 함께 먹기도 한다. 하는 일이라고는, 스마트 폰이나 랩탑을 들여다보는 건데, 그러면서 그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돈을 벌어들인다.
예지가 반드시 자기 다큐의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호석은 그야말로 ‘사라져가는 노동’을 상징하는 인물 같다. 근육질의 몸에 무표정하고 말을 잘 못한다. 혹은 안 한다. 호석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일 것 같다고 예지가 말하자, 상우는 냉소한다. 알고 보면 그저 빤한 노동자일지도 모른다면서.
상우는 인격화된 자본 같은 느낌이다. 별장의 cctv처럼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예술가인 예지가 자신의 카메라로 호석 부부를 관찰하는 장면까지 모두 보고 있는 존재다.
나는 궁금해진다. 미옥이나 철에게 감독이 부여하고자 한 상징적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상류층을 선망하는 인민대중? 무구한 마음? 그런 의문에 빠져 지루한 듯 느껴지는 순간에 영화는 두 가족을 상우의 별장으로 데려간다.
“미옥은 다시 옷을 입어 자유를 얻었다”
여러 일들이 일어난다. 앞에서 숨겨 놓았던 감정을 터뜨리고 매듭을 짓는 과정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오직 별장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해변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었다.
동의하는 이들이 여럿 있겠지만, 나는 영화나 그림 속에서 여자들이 옷을 벗는 행위가 결코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독의 전작인 <버닝> 속 한 장면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옥은 옷을 벗어서가 아니라 다시 옷을 입어서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 절규하는 호석의 모습. 예술이나 문화의 힘이 그리 허약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경찰이었다는 상우 할아버지의 호루라기.
‘호루라기’를 갖고 나온 철
상우가 철에게 호루라기를 불어 보라고 하자, 그 소리를 듣고 어린 시절 친구 역할을 해주었다는 별장지기가 달려온다. 호루라기를 불면 달려오는 아이라니, 해맑은 표정의 상우에게 진정한 친구 같은 건 없었다는 건가.
별장지기의 친구는 철이다. 둘은 별장의 cctv 모니터를 함께 바라보고, 정원에서 함께 나무를 향해 물을 뿌린다. 흩어지는 물방울이 만드는 무지개가 순수하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자동차를 닦아서 오염될 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식물에게 주어지는 생명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갈 때 철이 별장에서 호루라기를 갖고 나온 것은 별장지기가 더는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을까. 나는 문득 세상 모든 사람이 누구의, 무엇의 호루라기 소리에도 달려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같은 달을 바라보는 행위
불이 켜진 극장에서 나오면서, 제목이 말해주듯, 이건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결론을 내린다. 사랑은 너무 많은 층위를 포괄하고 있고, 너무 많은 가면을 쓰고 있는 말이다. 쉽게 변질되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차별과 이기심, 심지어 폭력에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기 카메라의 피사체를 사랑하고 싶어 하던 예지를 이해한다.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예지의 어긋난 사랑 타령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라도 타인에게 개입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 없다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운동회 장면에서 태권도 하기 싫어하는 아들을 찍으려는 카메라를 막아서는 미옥의 마음과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카메라를 끄는 예지의 마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호석과 미옥이 함께 달을 바라보던 마지막 장면에서, 중고등학교 때 쓰던 연습장 표지에 적혀 있던 글귀가 떠올랐다.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미옥은 집에 잘 갔느냐고 묻는 예지의 물음이 적힌 폰 화면에 자기가 찍은 달 사진을 포개 놓는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자고, 그 방향 저 너머에는 호석과 너와 나의 마음 같은 게 있을 거라고, 미옥은 말하고 싶었던 건가.
쌍차의 해고 노동자를 취재하겠다고 나섰던 나는 결국 포기했다.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간 끝에, 내가 쓸 수 있는 무엇도 그 속에 없음을 깨달았다. 영화 속 호석의 절규를 보는 예지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하지만 ‘나는 나야,’ 라고 말하는 견고한 마음이 조금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덕분에 영화 잘 보았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답장이 왔다.
‘저는 조마조마하면서 보았어요. 하지만 영화가 재미있어서 마음을 놓았어요. 쌍차 이야기를 많은 이들이 보는 건 좋은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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