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청년 위한다는 정치”가 허구인 이유 노령층 두배...청년 위해 제도 고쳐야

지난해 8월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대통령선거 40세 미만 출마 제한' 폐지를 위한 청년 정치인 공동선언 기자회견. 사진= 연합뉴스
지난해 8월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대통령선거 40세 미만 출마 제한' 폐지를 위한 청년 정치인 공동선언 기자회견. 사진= 연합뉴스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 했다. 네거티브가 주 선거전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네거티브만큼 유효한 전략도 드물다. 알라딘의 램프에서 뿅~ 하고 나타난 거인은 세 개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세 가지는 자신도 이루어 줄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 중 하나가 누군가로 하여금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거다. 한 번 미운 털이 박히면 이를 극복해내기는 그만큼 어렵다. 좋아하는 마음은 그보다 쉽게 스러진다. 그래서 네거티브 하지 말자는 말은 선거가 가까워오면 지켜지기 어렵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단점에 주목하는 걸까?

행동경제학자 캐너먼과 트버스키가 ‘손실회피편향’(Loss Aversion)이라 명명한 심리현상은 얻은 것의 가치보다 잃어버린 것의 가치를 크게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1만원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 1만원을 얻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보다 크다는 것이다. 네거티브가 유효한 이유다. 사람들은 훌륭한 후보를 뽑았을 때 돌아올 긍정적 효과보다 잘못 뽑았을 때 감내해야 할 부정적인 효과를 더 걱정하게 된다. 이런 편향은 특히 보수적인 사람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보수적’이란 여러가지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현상을 유지하려는 성향으로 하자. 새로운 모험과 시도, 그에 따른 위험을 피하려는 성향 말이다. 보수성이란 한 개인의 고유성향이기도 하지만, 세월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고령화와 보수화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슨의 연구 중에 이런 게 있다. 오늘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면 누구를 택하겠는가; 새로 사귄 친구? 아니면 가까운 가족? 젊은이는 새 친구를, 노인들은 가족을 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노인의 지혜일까? 아니다.젊은이들에게 곧 먼 곳으로 이사가게 될 거라는 얘기를 해 주고 다시 질문을 하면, 그들도 가족을 만나고 싶어한다.

결론은 이렇다. 사람은 현 상황에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짧다고 느낄수록 보수적이 된다. 흔히들 현재 한국의 고령층이 보수적인 이유를 산업화를 겪은 세대라는 말로 퉁치려 하는데, 설득력이 없다.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좀 극단적인 케이스겠지만, 김문수와 이재오가 간 길을 진중권이 가고 있고, 그 다음 세대도 결국 그렇게 될 거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걸까?

카스텐슨 vs. 기팅스

통계학자 존 기팅스의 Gittings Index는 새로운 시도에 얼마나 많은 가치를 두어야 하느냐를 지표화 한 것이다. 식당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나의 단골집이 전체 식당 중에 맛으로 따져 상위 50% 내에 든다면, 전혀 모르는 새로운 식당을 가는 것보다는 단골집에 가는 것이 만족도의 기대값을 높이는 길이다. 딱 한 번만 식사를 한다면 그렇다.

하지만 식사를 할 기회가 여러 번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직 안 가본 식당이 상위그룹과 비슷한 수준의 맛을 낼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맞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맛집을 많이 개발하고 즐기는 방법이다. 새로움에 대한, 약간은 무모하고 비합리적인 동경이 사회발전의 동력이었던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Exploit/Explore 문제도 같은 거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존의 프로그램을 변경해서 쓸 것인가(exploit), 아니면 전혀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할 것인가(explore)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전자는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할 수 없다. 하지만 실패의 위험은 줄일 수 있다. 후자를 택하면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할 가능성과 프로젝트가 실패할 가능성이 모두 높아진다. 담당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적을수록, 실패의 대가가 두려울수록 전자를 택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Exploiter)만을 택하는 회사의 장래는 밝을 수 없다. 국가와 사회도 마찬가지다. Exploiter들이 Explorer들을 압도하는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회 말이다.

다행히도 인류의 유전자 속엔 Gittings Index가 새겨져 있는 듯하다. 진화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살아남아 현 인류를 이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손실회피 편향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더 나은 사회정치체제를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 아닐까.

1963년 vs. 2022년

내가 태어난 해(1963년)엔 108만명의 아기가 새로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 인구분포는 넓은 종(bell)형이었다. 사회는 젊은이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특별히 가진 것 없어도 새로운 시도에 주저하지 않았다. 진화가 인간의 두뇌속에 새겨놓은 Gittings Index 덕에, 당시엔 젊은 낙관론이 사회에 팽배했었다.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시도해 보고자 펄펄 뛰었다. 1963년 대선에서 일본군 장교와 남로당 출신의 박정희가 윤보선을 이겼다는 게 당시 상황을 잘 말해주는 것 아닐까.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기회를 줄 용의가 있었던 사회. 비록 “용서할 수 없는 과거”라는 단점을 가졌다 해도.

2022년의 정치지형은 훨씬 보수적이다. 나와 함께 태어난 108만명 중 아직 80만명 이상이 살아남았다. 한때 민주화 세력의 중심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보수 세력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가까운 친구들만 보아도 불과 20년 전에 비해 생각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올해 첫 선거를 한 2004년생이 태어나던 해엔 신생아수가 47만이었다. ‘이대남’이니, ‘젠더갈등’이니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우리에 비해 진보적이다.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진보성향이 발현되기 위해 뚫고 나와야 할 보수층이 너무나 두껍다는 것이다. 1960년 20대 인구는 60대의 4배가 넘었다. 지금은 그 비율이 1/2에 불과하다. 그간 60대/20대 비율이 8배 이상 커졌다는 말이다. 그때에 비해 몹시 보수적인 사회가 됐다.

역사의 종말 vs. 진보의 종말

정치철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민주주의가 최적의 체제이기 때문에 인류가 민주주의에 도달함으로써 정치제도의 진보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럴까? 제도의 진보와 사회의 발전은 같지 않다. 더 이상 개선이 필요 없는 최적의 제도라면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직접 민주주의가 서구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이래 이루어진 변화를 보면 민주주의가 그간 사회발전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사회는 상당히 새로운 시각마저 수용해 발전을 이루어 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70년 전과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현재의 제도는 이런 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후쿠야마가 말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도 모든 개인의 의견이 평등하게 반영되는 1인 1표를 전제로 했을 것이다. 후쿠야마의 주장이 사실이기 위해선 지난 70년과 같이 사회가 새로운 철학과 가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러기엔 정치지형이 너무나 보수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바꿔 말해, 인류가 도달한 최적의 제도는 “종형 인구분포”와 “노령화에 따른 보수화”가 이루어 온 밸런스를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그 전제가 깨진 것은 아닐까.

청년을 위한 정치 vs. 청년을 위한다는 정치

정치인은 모두 청년을 위한 정치를 주장한다. 유권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60대 유권자가 20대의 두 배에 이르는 상황에서 그것은 말잔치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어느 드라마에서 최수종이 말했듯, 정치인은 표를 먹고 산다. 이 인구분포와 1인 1표제도에서 청년을 위한 정치를 하자는 말은 네거티브를 하지 말자는 말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린다.

더욱이 사회의 보수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100세 시대. 인구 분포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진 베이비 부머들은 점점 더 보수적인 연령대로 진입할 것이다. 30년 후에 돌아보면, 역대급 비호감 선거였다는 이번 대선이 최근 30년간 가장 덜 비호감 선거였던 것으로 기억될 지 모른다. 제도의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역사의 종말>은 1992년 작이었다. 이제는 <역사의 종말>에 종말을 고할 때가 아닐지.

글쓴이

전건우 칼럼니스트

이 글은 금융전문가 출신의 전건우 칼럼니스트(필명)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로, 필자의 허락을 받고 전문을 옮긴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필자의 요청으로 필명으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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