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급한 진실은 없다”는 아니 에르노의 전투문학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에 부쳐 집단적 고통의 환부 드러내기 “펜 가진 이들은 고통을 모르고, 고통받는 이들은 표현할 언어가 없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 원작의 영화 '레벤느망'의 스틸 컷.
베니스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 원작의 영화 '레벤느망'의 스틸 컷.

자기연민·도취 뛰어넘은 냉정함으로

문학을 사랑한다고 모두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되는데는 특별한 재능 하나가 더 필요하다. 자기노출의 재능이다.(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님이 비평가가 창작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딱 잘라 말씀하셨다.) 작가 아니 에르노를 보면 이 견해가 수긍된다. 그가 쓰는 것은 이런 이야기들이다. 딸을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부모의 끝없는 노동, 집에서 쓰는 말을 사용했다가 천박하고 상스럽다고 면박당한 사립학교 교실, 사립학교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 노출되어버린 구겨지고 더러운 속옷 차림의 어머니 모습, 아버지가 낫을 들고 어머니를 죽이려는 시늉을 하는 부부 싸움, 폭력적인 첫 경험,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기숙사 방에서 고뇌하는 여대생, 중절수술을 받으러 가서 겪는 모멸적 취급, 한껏 확장되었던 세계가 결혼과 함께 식재료와 청소용품과 기저귀로 졸아든 일상, 애타게 기다리던 불륜 상대가 다녀간 후 그의 정액을 몸에 계속 품고 싶어 움직이지 않는 중년의 열정, 유방암에 걸린 여성의 육체와 성(性),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나날 등등.

충격적이지만 통속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재들이다. 문제는, 허구는 없으며 자신이 겪은 일만을 쓴다는 작가의 공표였다. 초기작 두세 편은 작중인물의 이름을 등장시켜 소설의 외양을 유지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소설이 아닌 ‘이야기récit’로 장르 표시도 달리했다. 자신의 삶을 전면에 드러낼수록 피해야 할 덫은 늘어난다. 자기연민이나 자기도취라는 함정을 뛰어넘어야 한다. 부모라는 익숙한 타인의 삶을 타자화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지나온 세계에 대한 원망에도 죄책감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난관을 돌파하는 방식은 냉정함이었다. 부르디외(프랑스 사회학자-편집자주)의 사회학적 성찰은 상징폭력의 양상을 객관화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관찰했다. 경험들은 ‘écriture plate(밋밋한 또는 평평한 글쓰기)’라 작가 스스로 이름붙인 건조하고 꾸밈없는 문체로 표현되어야 했다. 이런 방식은 여성 작가/민중계급 출신 작가에 대한 이중의 선입견과 맞물려 ‘문학성’에 대한 폄하를 낳았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후 기자회견하는 아니 에르노. 사진=연합뉴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후 기자회견하는 아니 에르노. 사진=연합뉴스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드러내는 순간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그린 『자리La Place』(1984)와 『한 여자Une femme』(1988)가 큰 호응을 얻었던 경력 초기까지만 해도 문체에 대한 비판은 있었지만 평가는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여성작가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계층 문제를 다루었으며 민중계급 출신이 지식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당사자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점이 호평을 받았다. 신경숙의 『외딴 방』이 발표되었을 때 한국문학 평단의 분위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나 에르노는 여성성과 민중문화의 결합이라는 자기에게 할당된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곧이어 내놓은 작품은 어떤 사랑의 경험을 낱낱이 드러낸 『단순한 열정』(1992) 이었다. 아내가 있는 러시아 외교관과의 오직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불륜. 자신의 목소리로 가감없이 드러낸 여성의 섹슈얼리티. 공격과 비난이 쏟아졌고 이 책은 이전 작품 전체를 깎아내릴 구실이 되었다. 언론과 비평계는 선정적 노출의 전략을 의심하거나 작가의 억압된 욕망을 추측했고, 불륜으로 파멸한 여성인물의 대명사인 ‘마담 보바리’를 소환했다. 소재 자체의 통속성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 작품인 『마담 보바리』의 성취는 에르노의 작품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작가 플로베르가 아니라 여주인공 엠마 보바리에 유비되는 방식으로, 창조자가 아니라 개인적인 성벽을 히스테리컬하게 표출한 한 여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에르노 문학의 정치적 의의는 어떤 이들이 보이는 이런 신경질적인 반응에서부터 시작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드러내지 말아야할 것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임신중지의 자유가 없던 시절 불법 낙태를 감내해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 같은 것이다. 에르노의 첫 번째 작품이면서 스스로 자기 글 중 가장 격렬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빈 옷장』(1974)의 드니즈 르쉬르라는 인물이 겪는 일이다. 2000년에 에르노는 소설의 가면을 벗기고 자신의 체험 그대로를 다시 한번 서술했다. 그늘에 머물러야 할 비밀을 공적 영역으로 끌고 나와 헤집어놓는 행위는 노출증이라는 비난을 낳았지만, “저급한 진실이란 없”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속으로 밀어넣는데 기여하는 셈”이므로 “언어 속에 자리를 잡지못한” 임신중절을 말해야 했다(『사건L’évènement』). 다시 이십 여년이 흐른 후 『사건』은 영화화되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미국의 낙태권리법 위헌 결정은 1960년대 에르노가 겪었듯 여러 여성들이 개별적으로 겪었던 보편적 고통을 다시 현재로 끌어왔다.

“너는 세계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글이 되면 그것은 정치적”(『진정한 장소』)이라는 에르노의 믿음은, 글쓰기는 드러냄을 통해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려는 행동이므로 모든 작가들에게 “너는 세계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려는 것인가?”(『문학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정당하다고 한 사르트르 문학론과 공명하는 듯하다. 사르트르를 통해 새로운 눈을 얻었고 보부아르가 준 존재론적 충격과 함께 고독에서 벗어났으며, 문학사 전체에서 자신과 가장 가깝게 느끼는 작가는 카뮈라고 말하는 에르노는 문학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작가들의 계보를 시차를 두고 되살린다.

차이는 에르노가 실천하려 했던 “칼 같은 글쓰기”에서 펜은 무기라기보다 환부를 드러내기 위한 메스라는 점이다. 그리고 에르노가 드러내기를 선택한 환부는 주로 ‘지배당하는’ 이들의 미묘한 고통이다. 펜을 가진 이들은 고통을 알지 못하고, 고통받는 이들은 표현할 언어가 없다. 마치 이민자처럼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건너온 에르노는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는 일이 집단적 고통을 증언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를 제물로 내놓는다. 무엇을 드러낸다는 것은 소재로 삼는다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수치스러운 장면을 삼인칭이 아니라 ‘나’를 사용해 그려야 한다. 그래야 “독자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외면 일기』)이 가능하고, 동시에 작가도 글을 쓰고 있다는 수치를 잊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쓸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사회적 지위도 누리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 자신의 경험을 쓰면서 나 자신의 과거를 포함한 부모 세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드는 위험, 그에 대한 수치를 간직한 채로 글을 써야 한다.

“전투문학을 위한 위대한 날”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부끄러움』) 에르노가 문학이라는 제도의 지배적 관습을 넘어 ‘아름다운 것’과 ‘문학적인 것’을 재정의했으며, 따라서 에르노 이후에는 아무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없다고 말한 차세대 작가 에두아르 루이는 에르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전투 문학을 위한 위대한 날”을 축하했다. 은폐하고 부인하고 싶은 것들을 쓰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되살리는 방식으로, 에르노의 내밀한 글쓰기는 ‘전투문학’이 된다.

글쓴이

오은하 연세대 불문학 교수

오은하 연세대 불문과 교수는 서울대와 파리 3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장 폴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폴 니장,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 아니 에르노 등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한 작가들의 글을 주로 연구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인간의 재구성』 『사르트르의 미학』, 『카페 사르트르』, 『검은, 그러나 어둡지 않은 아프리카』 등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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