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물, 기름’ 대연합, 2차 세계대전 승리했다

[연합국 승리의 원동력은 뭘까] 히틀러가 오판한 연합국 리더의 단합 자본주의 미국, 제국주의 영국과 공산주의 소련, ‘상극’이지만 책임 다해 독일, 일본 등 추축국, 연합작전 한번 안해 노르망디, 바그라티온 전투, 히틀러에 강펀치

1945년 2월9일 리바디아 궁전에서 열린 얄타회담의 연합국 세 지도자.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요세프 스탈린 소련 총서기. 사진=타스통신
1945년 2월9일 리바디아 궁전에서 열린 얄타회담의 연합국 세 지도자.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요세프 스탈린 소련 총서기. 사진=타스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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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승패를 가른 요인들

미국과 소련, 영국으로 이루어진 연합국 진영과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으로 이루어진 추축국 진영의 일대 격돌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추축국에게 이긴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연합국의 민주주의가 추축국의 파시즘보다 우월하고 정의로운 체제여서’라는 순진무구한 답을 내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소련이 민주주의 국가였어?’라는 지적에 하릴없이 무너질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된 소련의 바그라티온 전투.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된 소련의 바그라티온 전투.

역사서를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산업 생산력에서 연합국 진영이 추축국 진영을 압도해서’라는 꽤 멋진 답을 내놓을 것이다. 이 답도 완벽하지는 않다. 생산력의 우위는 전쟁 승리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산력이 앞서는 쪽이 이길 확률이 높겠지만, 확률은 그야말로 확률일 뿐이지 필연은 아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작용하기 마련인 전쟁에서는 생산력의 우세가 자동적으로 전투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생산력의 위력은 숱하게 많은 단계를 거쳐야 싸움터에서 발휘되는데, 그 단계 단계에서 비효율과 마찰이 작용한다면 산업의 생산력은 강한데 군대의 전력은 약한 경우가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생산 현장의 우위가 전투 현장의 우위로 매끄럽게 전환되려면 국가 지도부, 특히 최고 통치자의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래서 역사를 들여다보면 전쟁에서 지도자가 무능한 강대국이 지도자가 유능한 약소국에게 지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지도부가 유능하지 않았더라면 연합국 진영의 총생산이 추축국보다 훨씬 더 앞서도 연합국의 승리는 확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수가 하나 더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은 두 나라가 싸운 전쟁이 아니라 크게 보아 모두 여섯 나라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싸운 전쟁이었다는 점이 그 변수다. 연합국 진영의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의 합이 잘 맞지 않고 사이가 나빴더라면, 연합국의 최종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 아니었다. 사실 자본주의 미국과 제국주의 영국과 공산주의 소련으로 이루어진 연합국 진영은 세 상극의 조합이었다. 불과 물과 기름이 한 데 모인 셈이다.

‘저들이 뭉칠 수 있을까?’...히틀러의 오판

이 세 나라의 연합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인 국가들의 어설픈 제휴에

지나지 않으니 곧 깨질 수밖에 없다고 본 아돌프 히틀러가 틀렸다고 하기도 힘들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인 영국은 본국과 여러 식민지만의 블록 경제를 유지하는 나라, 최고의 자본주의 강국인 미국은 자유무역으로 블록 경제를 깨고 세계 경제의 종주국이 되려는 나라, 계획 경제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의 본산인 소련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타도하려는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합리적’ 예상에 어긋나게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은 자국의 이익을 좇고 때로는 다투면서도 대연합의 큰 틀을 깨지 않는 대인 기질을 발휘했다. 세 나라의 지도자들은 다 개성 강하기로 이름났지만, 불과 물과 기름의 이질성을 이겨내고 단합을 끝끝내 유지해냈다. 히틀러가 헛다리를 짚었던 것이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일본의 도조 히데키. 추축국 진영의 이 세 지도자가 다 모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반면에 연합국 진영의 불과 물과 기름은 전쟁 동안 여러 번 만나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협동 작전을 논의했다. 미국이 「무기대여법」으로 제공하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군수물자 원조는 영국에게는 죽지 않고 버텨낼 힘을 주었고 소련에게는 나치 독일을 압도할 힘을 주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두 진영은 결속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추축국의 아돌프 히틀러 독일총통과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이 1940년 독일 뮌헨에서 만난 모습.
추축국의 아돌프 히틀러 독일총통과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이 1940년 독일 뮌헨에서 만난 모습.

상극이었던 3개 연합국, 각자 책임 다해

또한 추축국의 세 나라 군대가 공조해서 협동 작전을 펼친 적이 없는데, 연합국 군대는 죽이 잘 맞았다. 유럽의 서부전선에서 영국군과 미군은 늘 함께 싸웠고, 반대편 동부전선에서 싸우는 소련은 건너편의 영미군과 보조를 맞추며 작전을 펼쳤다. 1943년 여름에 동부전선의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가 그랬다. 독일군 전차 부대의 파상 공세를 소련군이 죽을 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을 때, 서부전선의 영미군이 북아프리카에서 시칠리아 섬으로 넘어가서 이탈리아에 발을 디뎠다. 동맹국 이탈리아를 지키내려고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알토란 같은 최정예 기갑 병력의 일부를 빼내 서쪽으로 보내야 했다. 이 탓에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힘에 부쳤고 결국은 ‘붉은 군대’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영미 연합군이 해안에 물자를 옮기고 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영미 연합군이 해안에 물자를 옮기고 있다.

1944년 여름에도 대연합의 위력이 발휘되었다. 6월 6일에 영미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3주 뒤인 22일에는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남북 1,000㎞ 전선에서 독일군을 쳐부수기 시작해서 단숨에 서쪽으로 700㎞를 전진했다. 연합군 세 나라의 사전 협의에 따라 정교하게 조율된 대작전으로 독일은 동서 양쪽에서 강펀치를 맞고 휘청거렸다. 아홉 달 뒤에 나치 독일은 허물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거대한 사건의 결과를 한두 개, 또는 두어 개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서로 상극인 미국의 루스벨트와 소련의 스탈린과 영국의 처칠이 히틀러의 예상을 깨고 유지한 대연합의 위력을 빼놓고는 연합국이 추축국에게 거둔 완벽한 승리를 설명할 길이 없다.

다음 글에서는 그 대연합의 속살을 더 속속들이 들여다보면서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인과 관계를 조금은 색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글쓴이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류한수 교수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영국 에식스대학 역사학과에서 러시아 혁명 및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의 산업체에서 일어난 변화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유럽현대사, 특히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러시아의 민족정책과 역사학》, 《서양사강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2차세계대전사》,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등이 있다. KBS의 <이슈 Pick, 쌤과 함께>, <역사저널 그날>, tvN의 <벌거벗은 세계사> 등에 출연했으며, 국방tv의 <역전다방>에 고정 출연한다. 현재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장이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여성전투원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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