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이근윤 사우디 사업가 겸 칼럼니스트
  • 글로벌
  • 입력 2024.03.16 14:13
  • 수정 2024.03.22 11:50

사우디, 스포츠 굴기인가? 스포츠 와싱인가?

[이근윤의 사우디, 중동 이야기]
세계 최고 축구선수들 싹쓸이 영입
국제 스포츠대회도 잇따라 유치성공
한국 과거 3S정책 연상시키는 "와싱"
활발한 국제교류, 사우디 위해 바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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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스포츠 시장 흔드는 사우디

호날두 2억 유로, 네이마르 1억 유로, 벤제마 2억 유로, 캉테 1억 유로. 최근 사우디 아라비아가 네임드 축구 선수들을 자국 리그로 불러들이며 쏜 연봉 총액이다. 현 시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추앙받는 음바페가 받는 7000만 유로와 메시의 4500만 유로를 훌쩍 뛰어 넘는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금액이다.

물론 음바페에게도 3억 유로, 메시에게도 4억 유로의 제안을 했지만, 두 선수는 이를 거절한 바 있다. 고액 연봉 외에 선수 영입을 위해 사용한 이적료도 8억 유로를 웃돈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국부펀드(PIF)는 3억 파운드에 잉글랜드 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했고, 알 힐랄, 알 나스르, 알 이티하드와 아흐리 등 사우디 리그 톱4 구단의 지분 75%를 갖고 있다. 앞으로 제대로 큰판을 벌여보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우디 스포츠의 통큰 베팅은 축구에만 그치지 않는다. 2022년 LIV(라틴어 숫자로 54를 뜻한다)라는 새로운 프로골프 리그를 출범시키면서, 8개 대회에 총 2억 5500만 달러라는 기존 PGA 투어 대회 평균의 2배가 넘는 상금을 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리그 가입만 해도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금을 지급했다. 결과적으로 필 미켈슨, 더스틴 존슨, 세르히오 가르시아, 브룩스 켑카, 브라이슨 디샘보 등 PGA 톱랭커들이 줄줄이 이적을 선언했다. 심지어 타이거 우즈에게는 10억 달러의 계약금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결국 사우디의 돈 공세에 굴복한 PGA투어는 작년 LIV와의 합병을 선언하며 세계 골프는 사우디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알나스르에 입단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사진=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 알나스르에 입단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사진= 연합뉴스

이뿐 아니라, 작년에는 테니스 선수 한 명도 없는 사우디에서 ATP테니스 대화를 개최하기 위해 수천만 달러의 상금과 후원금을 지불했고, 프로격투리그(PFL)에 1억 달러, 파라마운트 소유의 벨라토르 인수에 수천만 달러를 쏟아 부으며 MMA 시장 1위인 UFC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더 나아가 월드레슬링엔터테인먼트(WWE) 인수도 추진하고 있다. WWE는 최근 몇 년 새 다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스포츠 이벤트로 미국 프로레슬링 기구를 사우디가 물려받는다는 상징적 의미로 더 눈길을 끈다. 

작년 10월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린 복싱이벤트도 상징적인 사건이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인 타이슨 퓨리와 PFL소속 종합격투기선수 프란시스 은가누의 경기가 복싱의 메카인 라스베이거스가 아닌 사우디의 리야드에서 열렸다. 또한 석유공룡 아람코의 후원을 받는 포뮬라원(F1)도 지난해부터 그랑프리 레이스 개최지에 사우디의 제다를 포함시켰다. 스포츠 업계 신흥 시장인 e스포츠도 예외가 아니다. 사우디는 게임 산업 육성을 위해 40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내년부터 리야드에서 ‘e스포츠 월드컵’을 매년 개최하기로 했다. 사우디가 2021년 초부터 작년까지 스포츠 후원으로 사용한 돈만 63억 달러에 달한다

게다가 최근 사우디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세계 스포츠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최근 막대한 자본력으로 유치한 굵직한 대회만 네 개다. 2027 AFC 아시안컵, 2029 동계아시안게임, 2034 하계아시안게임, 2034 FIFA월드컵이 모두 사우디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렇게 몰아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빼곡한 일정이지만, 오랜 '은둔의 나라'가 개방으로 나오겠다는 선언에 국제사회가 적극 화답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많은 인프라를 중복 활용하여 개최 시너지를 높일 수 있다는 점도 사우디 입장에서는 큰 매력으로 보인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사우디 아라비아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탈석유하며 '소프트 파워' 키우기

그렇다면 이렇게 숨가쁠 정도로 달리고 있는 사우디의 스포츠 투자에 대한 여론은 어떨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제사회가 여러 국제 대회를 몰아주고 있는 것은 사우디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사우디 내부적으로도 지금까지 조용했던 나라가 다양한 국제 행사로 떠들썩한 분위기가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이다. 어쩌면 이웃의 조그마한 '동생'이라 할 수 있는 두바이나, 카타르가 다양한 이벤트를 먼저 치르며 앞서 나가는 것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우디인들 입장에서는 뒤늦게나마 화려하게 국제 사회에 등장한 자국의 ‘스포츠 굴기’가 몹시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켠에서는 엄청난 자금을 뿌리며 스포츠 투자에 열을 올리는 사우디 정부의 움직임을 ‘스포츠 와싱(Sports Washing, 스포츠를 통한 이미지 세탁)’이라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않다. 여성과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상존하고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우디가 어두운 현실 대신 스포츠로 눈을 돌리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마치 우리나라 군사독재 정권이 1980년대의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를 시작하고,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유치해 스포츠를 육성했던 장면과 흡사하다. 당시에 성인영화 상영기준을 대폭 완화해 국민들의 시선을 영화로 돌리고,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해 유흥가가 급팽창하게 하는 등 소위 Sports, Screen, Sex의 3S 정책의 판박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 대해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는 “스포츠 와싱으로 사우디 국내총생산(GDP)가 1%라도 늘어날 수 있다면 나는 스포츠 와싱을 계속할 것”이라 밝히며 정면돌파를 시전하고 있다. 그런 비난을 받을지라도 사우디 경제의 성장과 탈석유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포츠는 왕세자가 주도하는 ‘비전 2030 프로젝트’의 주요축 중 하나로 꼽힌다. 경제 구조 다양화 및 여러 분야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GDP의 50%에 달하는 석유 의존율을 낮추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육성을 통해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 분야의 인재 개발로 일자리를 창출하여 자국민들의 민심을 얻겠다는 것이다. 많은 해외 관광객들을 유치하여 국부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한 발 앞서 있는 역내 경쟁자인 두바이나 카타르를 넘어서겠다는 의지도 보인다. 한국도 스포츠와 컨텐츠 산업에서의 약진으로 얻은 '소프트 파워'로 전세계에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여 온 만큼 사우디로서도 충분히 노릴 만한 국가경쟁력 강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개방된, 진취적인 국가로 바뀌길 바랄 뿐

사우디에 11년째 살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사우디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스포츠 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이 반갑기 그지없다. 한국도 한 때 무엇보다 순수해야 할 스포츠가 정권의 그림자를 가리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아픈 시절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활발한 국제사회와의 교류를 통해 좀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당시의 스포츠 집중 육성과 개방이 없었다면,  손흥민, 류현진, 김연아, 박세리 등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던 6월 항쟁 때, 제2의 광주민주화 항쟁과 같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코앞에 두었던 전두환 정권이 어쩔 수 없이 6.29선언을 통해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스포츠가 역사를 바꾼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사우디에서도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지 않나?

지난 사우디의 엑스포 유치 관련 글(칼럼: 엑스포 결정, 사우디는 무엇을 잘했나)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슬람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국제 사회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포용과 공존의 사회를 형성했을 때이다. 모쪼록 사우디 정부의 스포츠에 대한 통큰 베팅이 성공해 사우디가 좀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게 되길, 다양한 시민사회와 국제 사회의 요구를 수용해 포용적인 사회가 되길 열렬히 응원한다.

※ 필자인 이근윤은 서울대에서 환경과학을 전공했다. 한국렌탈 중동총괄 이사를 역임했고 현재는 켄렌탈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에서 5자매를 홈스쿨링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이메일 주소는 musc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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