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전우용 역사학자
  • 시사
  • 입력 2024.03.06 16:18
  • 수정 2024.03.13 10:15

[조국 신당③] 민중시대의 종언과 조국혁신당

[전우용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다시 우리 정치사에 탄생한 진보정당
과거 진보정당의 실패를 잘 살펴야
'시민 대중의 시대'로 전환됐음 자각하길
새 진보정당의 성공, 인물과 정책에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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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후 첫 대중적 진보정당의 탄생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공식 출범했다. 분단 이후에도 진보당, 민주혁신당, 사회대중당 등 진보적 강령을 내건 정당들이 명멸(明滅)했으나 반공이 ‘국시(國是)’인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정당이 대중적 기반을 갖기는 어려웠다.

민주노동당은 전국적 지지 기반을 확보한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정당이었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정권의 노골적인 친재벌 반노동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가톨릭노동청년회,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종교단체가 노동자들을 도왔고,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처지를 개선하려는 의지도 강해졌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동일방직, 원풍모방, 청계피복 등에서 민주노조 결성 또는 어용노조 민주화 운동이 정권의 야만적 탄압에 맞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두환 일당은 정권을 잡은 후 노동관계법을 개악하여 ‘제3자 개입’을 금지하는 등 종교단체나 지식인들이 노동자와 연대하는 길을 끊으려 했으나, 1980년대에는 많은 학생이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스스로 ‘노동자의 정체성’을 취득했다.

1987년 6월항쟁 직후, 억눌렸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이른바 ‘7-8월 노동자대투쟁’의 결과 주로 봉제산업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했던 노동운동은 대규모 산업단지의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노동조합은 ‘순수하게’ 노동자의 처우 문제만 다뤄야 한다는 반공주의적 고정관념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도 ‘노동자의 정치적 진출’이나 ‘민중운동과 현실정치의 연계’ 같은 담론에 ‘좌경용공’이라는 낙인을 찍기는 했지만, 민중의 권익을 지키고 확장하려면 노동조합이나 농민단체뿐 아니라 ‘민중정당’도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계속 늘었다.

1987년 백기완 등이 만든 ‘민중의당’은 창당 목적이 ‘진보담론’을 알리는 데에 있었을 뿐 국회 의석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95년 민주노총이 창립된 뒤에는 ‘민중정치’를 현실화하려는 사회적 욕구도 고조되었다. 그 욕구의 실현태가 민주노동당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침해하고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방해하는 각종 법적, 제도적, 관행적 문제들을 입법기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탈민중' 시민 정당의 출현

그런데 민주노총이 창립되기 직전부터 한국 사회의 ‘민중’ 담론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1987),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1989), 환경운동연합(1993), 참여연대(1994) 등 ‘탈(脫) 계층적’ 시민단체들이 설립된 것이다. 이들 단체가 출현할 당시에는 ‘중산층의 관심사를 대변하는 운동으로서 민중운동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점차 ‘민중’이니 ‘민중운동’이니 하는 말의 사용빈도는 줄어들고 대신 ‘시민’이니 ‘시민단체’니 하는 말이 ‘시민권’을 확보했다.

‘민중’이라는 단어가 소멸 과정을 밟은 데에는 역대 정권이 이 단어를 불온시한 탓도 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도 큰 몫을 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화함으로써, 대기업 노동조합원이 될 수 있는 정규직 노동자는 ‘귀족 노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들 스스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차별화하려 했고, 그러면서 ‘민중’이라는 이름에 거부감을 느꼈다.

이런 현상은 민주노총의 정치적 대변자 격이었던 민주노동당의 좌표 설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정규직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정규직 조직 노동자들의 처우도 나아진다’는 캠페인은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노동조합들과 민주노동당 사이의 괴리만 심해졌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거에서 10명의 당선자를 국회에 입성시키는데 성공했다. 사진=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거에서 10명의 당선자를 국회에 입성시키는데 성공했다. 사진=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지역구 당선자 2명과 비례대표 당선자 8명 등 10명의 당선자를 내며 해방 이후 진보정당 최초로 원내 진출에 성공했고 2006년 지방 선거에서는 정당 득표율 12.1%를 기록할 정도로 약진했지만, 당내의 노선 차이와 정치·사회환경의 변화로 인해 200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내분을 겪었다. 2011년 민주노동당은 ‘시민 참여 정치’를 표방한 국민참여당 및 새진보통합연대와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으로 개편됐으며, 이른바 NL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2012년 정의당을 새로 만들었다.

2012년 총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은 지역구 7석, 비례 6석, 정당 득표율 10.3%를 기록했으나 201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정당 판결로 해산되었다. 민주노동당의 맥을 이은 정당은 정의당만 남았다.

민중 담론 대신 젠더이슈만 남은 정의당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은 전통적인 ‘민중 담론’과 결별한 모습을 보였다. 정치적 성쇠(盛衰) 문제와는 별도로, 사회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은 유럽에서는 보편적 복지시대에 진입한 뒤 환경, 젠더 등의 문제를 중심에 두는 ‘새로운 진보’가 출현했다.

유엔은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했지만, 지금의 한국이 보편적 복지국가인가?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의 노회찬은 노동과 빈곤을 화두로 삼은 ‘구 진보’였지만,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 비례대표 1, 2번을 받은 두 여성은 ‘젠더’만을 화두로 삼았다. 그들은 오래된 진보의 가치를 버리고 실천으로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진보 담론을 내세웠다. 심지어 그때 노동자 겸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며 정의당 비례대표 1번을 받은 사람은 지금 ‘반페미니즘’의 대표 격으로 알려진 사람이 주도하는 정당으로 옮겨갔다.

스스로 원했든 상황 변화 때문이었든, 정의당은 ‘민중’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제 1970~80년대 민중운동을 경험한 사람들 또는 그 자장(磁場) 안에 있는 사람들, 또는 여전히 ‘민중’인 사람들에게 정의당은 자기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다. 지난 4년간 정의당의 의정활동에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타투 합법화’나 ‘절름발이는 장애인 비하’라는 주장 정도다.

녹색당과 통합한 정의당은 민중과 결별했다. 사진=연합뉴스
녹색당과 통합한 정의당은 민중과 결별했다. 사진=연합뉴스

민주노동당이 창당될 무렵 관계자 한 사람에게 들은 얘기다.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진짜 지지율은 15% 정도 되지만 양당 지배 구도하의 사표 방지 심리 때문에 실제 득표율은 그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다만 진보정당 소속 정치인이 국회에 들어가 민중의 이익을 위해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활동하면 사표 방지 심리도 점차 극복될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여 년간의 선거를 통해 지역구는 민주당 후보에게, 비례대표는 진보정당에 교차 투표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입증되었다. 그런데 정의당 관계자들의 ‘공식적 발화(發話)’와는 무관하게, 요즘의 유권자들은 이 당을 민주노동당의 후계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당 소속 국회의원들도 자기가 ‘민중의 정치적 대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노동자와 농민,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진보정치는 이렇게 막을 내리는가 싶었다.

새 진보정당의 탄생, 대중의 마음 사로잡아야

그러던 차에 조국혁신당이 생겼다. 정치적 의도를 조금도 숨기지 않은 검찰의 표적수사, 별건수사로 인해 조국의 부인과 동생은 감옥살이를 했으며 딸은 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이 취소되고 의사 면허를 반납해야 했다. 검찰의 집요한 ‘조국 일가 멸문 작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국 또한 선거 개입 혐의로 2심 유죄 판결을 받았다. 총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이 전국으로 다니며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공공연히 하는 나라에서 선거 개입 범죄라니.

그 개인과 가족이 겪은 역경과 불운의 서사(敍事)는 사필귀정(事必歸正),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극적 결말을 바라는 대중의 욕구에 부합한다. 이런 욕구는 투표장에 가는 것으로 분출될 것이다.

조국혁신당의 초대 당대표로 선출된 조국 대표가 3월3일 창당을 선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조국혁신당의 초대 당대표로 선출된 조국 대표가 3월3일 창당을 선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또 하나, 조국은 민주당보다 왼쪽에서 민주당보다 더 선명하게 검찰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공표했다. 몰락했거나 몰락해 가는 것으로 보였던 진보정치를 소생시키겠다는 선언에 다름아니다. ‘민중의 시대’는 갔지만 일하는 사람이 정당한 처우를 받고 가난한 사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은 아직 살아있다.

조국혁신당이 정의당 스스로 걷어차버린 그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여부는 어떤 인물과 정책을 내세울지에 달렸다. 조국혁신당은 그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두환 박정희 시대를 넘어 이승만 시대로 급속 퇴행하는 폭주열차를 멈춰 세울 수 있을 터이다.

※ 필자인 전우용 교수는 우리 시대의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 현안에 대해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는 역사학자다. <우리 역사는 깊다>, <내 안의 역사>, <민족의 영웅 안중근> 등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