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이동연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 오비추어리
  • 입력 2024.01.21 12:15
  • 수정 2024.01.28 17:23

위대한 카이저, 베켄바우어를 추모하며

[K리그 발전위 위원 지낸 이동연 교수의 추모]
현대 축구의 우아함과 유연함, 다양성의 미학
진일보시킨 위대한 축구의 카이저
요한 크루이프와의 월드컵 결승전 '명승부'
선수, 감독, 축구행정가로 성공한 '축구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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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켄바우어에 대한 추억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이직으로 부산에 잠시 터를 잡았다. 내 학기 말 통지표에 적힌 유일한 칭찬이 “서울말을 잘함”이라 할 정도로 부산은 내게 너무 낯선 곳이었다. 천성이 내성적이어서 몇 달이 지나도 친구도 잘 못 사귈 즈음, 우리 반 친구 중에 빵집을 하는 아이가 나를 가게로 데리고 갔다. 그 빵집이 우리 집과 가까워서 가끔 놀러 가면 친구 아버지가 크림빵을 주셨다. 그날도 솔직히 빵을 먹고 싶어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유리창 너머 흑백 TV로 축구 중계가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친구 아버지가 가게로 들어오라 해서 크림빵에 우유를 마시며 축구를 아무 생각 없이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전 서독과 네덜란드의 경기였다.

어찌 보면 이 경기가 내가 지금까지 축구를 가장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결승전은 내 무의식의 심연에 축구를 강력한 표상으로 남게 했다. 아내가 가끔 내게 신기하다고 말하는 게 하나 있다. 밤에 축구를 보고 들으며 글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도 너무 신기하고, 글을 쓰면서 골이 들어가는 시점에 정확히 고개를 돌리는 것도 너무 신기하단다. 나도 왜 그런지 정확히 모르겠다. 축구를 보면서 글을 쓰는 멀티플레이의 반복 기능과 골의 순간을 동시에 감지하는 강렬한 인지 자동화 욕망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이 어린 시절 마들렌을 연상하는 “감각의 기호”처럼, 아마도 어린 시절 서독월드컵 결승전 경기가 내 무의식 안에 강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추모행사에서 중앙무대를 장식한 추모 사진과 글.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추모행사에서 중앙무대를 장식한 추모 사진과 글.  

위대한 축구 황제

그 세기의 결승전에 서독팀의 주장으로 나온 위대한 축구선수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가 지난 1월 7일 7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 구단과 독일의 대표적인 축구 잡지 『키커』지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헌사를 3개의 단어로 요약했다. “플레이어, 카이저, 그리고 인간” 그는 현대 축구의 역사에서 “리베로”와 “멀티플레이어”의 의미를 가장 잘 수행한 위대한 축구선수이자, 강력한 카리스마와 규율로 바이에른 뮌헨 클럽과 독일 국가대표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독일의 축구 황제였다. 그리고 축구를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자기규율과 도덕에 충실했고 은퇴 후에도 뛰어난 축구 행정가로서 독일과 세계 축구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1945년 바이에른 뮌헨에서 태어난 베켄바우어는 1964년 19세 나이로 뮌헨에서 데뷔한 이래 뉴욕코스모스, 함부르크 SV를 거치면서 총 560경기 79골을 넣었다. 1965년 독일 국가대표로 데뷔해 총 103경기 14골을 기록했다. 1972년 유럽선수권 우승, 1974년 서독월드컵 우승을 이루었고, 감독으로 독일 대표팀을 이끌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축구선수의 최대 영예인 ‘발롱도르’(Ballon d'Or)도 1972년, 1976년에 두 차례 수상했다. 단언컨대 전 세계 축구사에서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축구 행정가로서 베켄바우어만큼 모두 성공한 사람은 아직 없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축구 황제의 위대한 유산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뮌헨의 홈구장 알라안츠 아레나의 경기장에 그를 추모한 그림과 꽃.
뮌헨의 홈구장 알라안츠 아레나의 경기장에 그를 추모한 그림과 꽃.

바이에른 뮌헨의 모든 것

동시대 독일축구 지형은 바이에른 뮌헨과 반 바이에른 뮌헨으로 나뉜다. 1963년에 독일 통합 리그로 출범한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지금까지 23회 우승을 했다. 특히 2012-13 시즌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총 11회 연속 우승 중이다. 독일의 다른 클럽들은 뮌헨의 우승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공동전선을 구축할 정도다. 뮌헨은 독일 모든 축구 클럽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뮌헨의 우승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팀이 도르트문트인데 뮌헨이 11회 연속 우승을 하는 동안 아쉽게도 7회나 준우승을 했다. 역사적으로 독일 근대 중공업의 산지 루르 지역을 대표하는 도르트문트와 독일 전체 경제를 먹여 살린다는 바이에른 지역의 뮌헨의 “데어 클라시커(Der Klassiker) 더비”는 사실상 “뮌헨 대 반 뮌헨”의 정서가 깔려있다.

분데스리가가 출범한 1963년 초기에 바이에른 뮌헨은 그리 강팀이 아니었다. 분데스리가 출범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2부 리그였다. 분데스리가 초기에는 퀼른, 베르더 브레멘, 보루시아 MG가 강팀이었다. 그런데 뮌헨 출신 베켄바우어가 1964년 1군 데뷔를 하자마자, 당시 2부리그에 머물렀던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1부로 승격했다. 그가 1977년 뉴욕코스모스로 이적하기까지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리그 3연패,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 3연패를 달성해 유럽 클럽의 신흥 강호로 등장했다.

현역 은퇴 후에도 베켄바우어는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뮌헨 구단의 회장, 2002년부터 타계하기 직전까지 명예회장을 맡아 바이에른 뮌헨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그는 전설이자, 현재 그 자체였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그의 실질적, 상징적 영향력이 막대해서 ‘카이저’로 불릴법한 일화가 많다. 일례로 현재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끄는 위르겐 클린스만(Jurgen Klinsmann)이 2006년 독일 월드컵 감독으로 있을 때, 당시 뮌헨의 상징이었던 골키퍼 올리번 칸(Oliver Kahn)을 쓰지 않고, 아스널의 옌스 레만(Jens Gerhard Lehmann)을 주전 골키퍼를 기용했을 때, 당시 독일 축구협회장이었던 베켄바우어와 클린스만 사이의 갈등이 깊었다. 이는 독일 축구계를 지배하는 뮌헨 수뇌부의 입김이 작용하여 베켄바우어를 통해 클린스만에 경고한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갈등이었다. 왜냐하면, VfB 슈투트가르트 유스 출신 클린스만은 토트넘을 거쳐 뮌헨 선수로 뛸 때, 뮌헨 클럽의 전설의 선배 수뇌부하고 적지 않은 마찰을 빚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클린스만은 뮌헨 입단 2년만에 이탈리아 삼프도리아로 전격 이적했다. 어쨌든 뮌헨의 레전드 플레이어이자, 감독이자, 구단 회장이었던 베켄바우어는 클럽 1군 데뷔에서 죽기까지 60년 동안 뮌헨의 심장이자 황제였다.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전에서 공을 다투고 있는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우어(오른쪽)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전에서 공을 다투고 있는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우어(오른쪽)

이기는 자가 강한 자이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vs 요한 크루이프

축구선수와 감독들이 남긴 명언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면,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자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의 배경에는 토탈 사커의 대명사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Johannes Cruijff)가 있다. 1970년대 초중반 세계 축구의 흐름은 브라질로 대변되는 “아트사커”에서 전원공격, 전원 수비로 요약되는 “토탈 사커”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가 있다. 네덜란드 토탈 사커는 1970년대 초 아약스 암스텔담을 이끌던 마리누스 미헬스(Marinus Michels) 감독이 만든 전술로 수비수의 디펜스라인을 끌어올리고, 공격수의 강한 전방압박을 통해 모든 선수들이 플레이에 관여하게 만들어, 당시 수비와 공격이라는 단순한 전술 이분법을 해체했다. 이 토털 사커는 위르겐 클롭(Jürgen Klopp), 토마스 투헬(Thomas Tuchel), 위르겐 나겔스만(Julian Nagelsmann) 등이 완성한 독일식 “게겐프레싱”(Gegenpressing)과 루이스 아라고네스(José Luis Aragonés Suárez), 델 보스케(Del Bosque), 펩 과르디올라(Pep Guardiola) 감독이 완성한 스페인식 “점유율 축구”로 분화되었다.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축구계와 언론은 토털 사커를 앞세운 네덜란드의 우승을 예상했다. 네덜란드에는 토털 사커의 핵심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상을 뒤엎고 서독은 네덜란드에 2 대 1 역전승을 거두고 1972년 유럽 선수권대회에 이어 2연속 메이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경기가 끝나고 베켄바우어는 “요한 크루이프가 나보다 더 위대하지만, 우승은 내가 했다”라는 말로 “이기는 자가 강한 자”임을 강조했다. 요한 크루이프는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에 뛰면서 518경기 294골을 넣고 3차례 발롱도르를 수상한 1970년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이었지만, 결국 월드컵 우승은 베켄바우어가 했다. 베켄바우어와 크루이프는 지금의 메시 대 호날두처럼, 시대를 대표하는 라이벌이었지만, 메시와 호날두가 ‘메호 대전’처럼 불편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 친했다.

그 둘은 은퇴 후에 요한 크루이프가 2016년 사망할 때까지, 절친 관계를 유지했다. 요한 크루이프가 사망할 때, 베켄바우어는 “나는 충격을 받았다. 요한 크루이프가 죽었다. 그는 나에겐 매우 좋은 친구였을뿐만 아니라 형제와도 같았다”라는 추모사를 남겼다.

다정한 모습의 프란츠 베켄바우어(왼쪽)과 요한 크루이프
다정한 모습의 프란츠 베켄바우어(왼쪽)과 요한 크루이프

영원한 리베로, 베컨바우어

베켄바우어가 타계한 후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은 1월 12일 호펜하임 전에서 그의 등 번호 5번을 모두 새긴 저지에 “당케 프란츠”란 글로 그를 추모했다. 지난 1월 19일에는 뮌헨의 홈구장인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독일과 해외 축구관계자 및 팬 3만 명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 피치 위 센터 서클에는 등 번호 5번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의 뒷모습과 행사 중앙 무대에는 “플레이어, 황제, 인간”의 세 글자가 그의 전 생애 삶을 표현했다.

베켄바우어는 공격 대 수비의 근대적 이분법을 깬 최초의 축구 스타이다. 중원에서 전방과 후방 플레이에 모두 관여하는 베켄바우어를 일컬어 “리베로”(libero)라 칭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홍명보를 한국의 베켄바우어로 칭하는 것도 그의 넓은 수비 범위와 후방 빌드업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다.

현대 축구에서 “리베로”는 수비의 최후방에서 플레이하는 “스위퍼”에 비해 진일보한 전술이다. 베켄바우어의 탁월한 리베로 플레이로 인해 축구가 훨씬 역동적이고 전술도 유연해졌다. 현재 선진 축구가 구사하는 후방 빌드업, 전방압박, 윙백의 ‘비대칭 플레이’(inverted fullback), 측면과 중앙을 다시 분할하는 ‘메짤라’(mazzalla) 플레이와 같은 유연한 전술은 베켄바우어의 “리베로” 플레이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베켄바우어는 현대 축구의 우아함과 유연함, 그리고 다양성의 미학을 진일보시킨 위대한 축구의 카이저이다. “Danke Franz, RIP”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라안츠 아레나의 잔디 구장에 장미꽃으로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등번호 '5'번이 수놓아졌다. 사진=이동연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라안츠 아레나의 잔디 구장에 장미꽃으로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등번호 '5'번이 수놓아졌다. 사진=이동연

 

※ 이동연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에서 문화이론, 예술정책, 공연기획을 가르치고 있다. 음악과 축구를 좋아해서 관련된 저술 및 현장 활동을 많이 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음악감독, 글로벌음악도시서울플랜 MP, K-리그 발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리버풀FC의 오랜 팬이기도 하다. 현재 현대차정몽구재단이 주최하는 계촌클래식축제 총감독, 대표적인 문화NGO 단체인 문화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