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 문화
  • 입력 2021.10.26 10:35
  • 수정 2021.12.29 18:50

훔쳐보는 영화의 황홀함이란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영화 보기 어려웠던 시절 몰래 보는 영화
간절한 기다림뒤 스크린속 경이감...또 허무
스크린속 낙원이 진짜이길 바랬던 마음 아닐까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어린 시절, 몇 차례 아버지 손 잡고 따라가서 봤던 영화들은 대부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압도적인 크기의 스크린 속 인물들은 어린 아이에게는 위압적이었다. 소리 또한 귀청이 얼얼할 만큼 컸던 느낌이 강렬했다. 어린 아이가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그런 영화 외적 상황에 대한 체험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엄마랑 손잡고 갔던 '극장구경'

엄마 친구분이 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댁에 놀러 갔다가 집 옆의 극장에도 잠깐 들어갔다 나왔던 기억이 나는데 필자에게는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무서운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그 느낌은 단순히 무섭다고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묘한 것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 복면을 뒤집어 쓴 남자에게 붙잡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었던 듯하다. 극장 구경(그 때는 영화관람이라 하지 않고 '극장 구경'이라 했다)을 시켜주겠다는 엄마 친구분의 호의에 들어가긴 했으나 아무래도 이 영화는 아니다 싶었던지 엄마는 금방 내 손을 잡고 극장 밖으로 나왔다.

그 당시의 필자는 일곱 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기묘한 장면에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극장 밖으로 나오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쉬웠던 기억이 새롭다. 그 장면들은 무서우면서도 묘한 에로틱한 느낌을 주었는데, 물론 그 당시에는 에로틱이 뭔지도 몰랐겠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어렴풋이 유추해 보자면 스크린 속 여자의 짧은 머리카락과 흰색 비닐 같은 파격적인 의상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런 헤어스타일이나 옷은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감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훗날 영화공부를 하면서 그 영화와 다시 조우하게 됐는데, 르네 끌레망 감독의 <빗속의 방문객>이었다. 어린 시절에 봤던 장면과 재회하고 보니 마치 잃어버렸던 편린을 되찾은 것 같았다.

르네 클레망 감독, 찰슨 브론슨 주연의 '빗속의 방문객' 포스터.
르네 클레망 감독, 찰슨 브론슨 주연의 '빗속의 방문객' 포스터.

어린 시절에 각인된 기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다가 한참 진행된 뒤에야, 비로소 몇 년 전에 이미 봤던 영화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 어른들의 기억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영화보기 힘들던 시절에 압도당한 느낌들

그 시절에는 학생의 영화관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했던 시대였고, 상영되는 영화 편수도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던데다, 한번 내걸린 영화는 보통 몇달 이상 상영됐었다.아날로그 시대라 지금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전 영화관에 영화가 배포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어쩌다 할리우드 대작 영화가 상영된다고 입소문이 나면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목적을 성취하는 순간 욕망도 끝이 난다. 기다림의 카타르시스는 거품처럼 사라진다. 몇시간씩 줄을 섰다가 본 영화는 기다린 시간을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영화관을 나온 후에도 영화로부터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학창 시절 종로의 좁은 골목을 따라 돌고돌아 긴 줄을 서며 봤던 영화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멀티플렉스 영화관 스크린보다 훨씬 큰 대형 화면에 압도됐던 느낌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지금은 좌석이 훨씬 고급스러워졌고 편해졌다. 온라인 예매 덕분에 시간을 낭비할 일도 없어졌지만 착석하는 순간, ‘그 시절 기다림의 설렘을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학창시절 체험했던 영화관은 그야말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별천지였다. 지구 다른 편의 세계는 언제나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산이 높은만큼 골짜기도 깊은 법. 스크린 속의 세계가 경이로웠던 것만큼 현실이라는 문턱을 넘는 순간, 몹쓸 느낌이 밀려왔다. 숨결이 느껴지고 피부가 닿을 만큼 밀접하게 느껴졌던 영화배우들과의 특별한 관계는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서 무례할 만큼 침투하는 햇빛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영화배우와 공유했던 필자의 정서가 현실이라는 문을 통과하는 순간,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맞닥뜨린 햇빛이 허무로 몰아넣었다.

스크린 속의 탁자에 놓인 꽃 한 송이도 예사롭지 않았던 존재감에 비해 현실 속의 사물에는 그런 '아우라'가 없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대화도 너무 시시했고 햇빛조차도 평범하게 느껴졌다.

숨막힐 듯한 사랑도 한순간이듯

그런데 영화관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현상이 예사롭지 않게 변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아팠던 곳도 통증을 잊게 하는 묘한 마력이 사랑이다.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도 방금 전에 스크린 속의 배우와 살을 맞댔던 것처럼 연인과의 설렘은 '옥시토신'을 마구 분비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한편, 숨막힐 것 같은 사랑의 감정도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했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란 대사가 기억에 남는 건,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드라마, 가요, 소설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이란 먼 옛날의 전설처럼,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신화처럼, 스크린 속의 숨소리까지 느껴지지만 잡을 수는 없는 영화배우의 이미지처럼 실체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순간적이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유지되는 남녀관계조차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과 편안함, 그리고 정이다. 사람을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마약 같은 사랑이란 '불안정함' 그 자체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주인공 마릴린 몬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주인공 마릴린 몬로.

진짜라 믿고싶은 욕망 

필자가 느끼는 영화도 그런 영역 선상에 있다. 영화라는 그림자놀이는 실제보다도 더 매력적이며 치명적이다. 어린 시절의 필자에게 영화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대’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주말의 명화는 ‘비밀의 정원’이었으며 ‘금단의 사과’였다.

아버지는 늦게까지 TV를 시청하는 것을 금했고, 아무리 볼륨을 줄여도 안방에서 이내 불호령이 떨어졌다. 흑백 영상으로 보는 주말의 명화는 ‘금지된 영역’이었기에 신비로운 세계에 접근하려는 욕구는 더 강렬했다. 현실을 뛰어넘는 도전을 해서라도 신비한 세계에 도달하고 싶었다. 그러나 안방에서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영화에 몰입하기가 힘들었고 차라리 영화 보기를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불안한 세계보다는 안정된 현실을 택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컴컴한 심야, 언제 떨어질지 모를 아버지의 불호령을 염려하면서 가슴 졸이며 봤던 주말의 명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마릴린 먼로의 머리카락은 분명히 흑백 TV로 봤을텐데도 필자의 기억과 느낌으로는 눈부신 금발이었다.

지각도, 기억도 언젠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불가능한 낙원을 꿈꾸며 눈 앞에 펼쳐지는 현상이 진짜라고 믿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심리상담사인 이화정은 영상번역작가로 일하면서 약 700편의 영화와 TV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다. 그 후 영화이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통합예술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와 심리에 관한 방송, <꿈꾸는 씨네 카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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