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김현철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 과학
  • 입력 2023.01.24 19:04
  • 수정 2023.01.25 17:34

1935년 아인슈타인, 2022년 웜홀과 양자얽힘

[어느 이론물리학자가 보는 세상]
뚜벅뚜벅 발전하는 양자역학 이야기
지난해말 '네이처'에 오른 놀라운 논문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도 통하다니

양자 얽힘

지난해 11월 30일 <네이처>에 놀라운 논문이 한 편 출판되었다. “양자 프로세서에서 통과 가능한 웜홀 동역학”이라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제목의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이론물리학에서도 어렵다고 알려진 두 가지 주제를 동시에 다룬다. 하나는 중력이론에서 나오는 '웜홀'(wormhole)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역학에 내재되어 있는 '비국소성'이다. 이 비국소성은 '양자 얽힘'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건 '홀로그래피'라는 개념이다.

웜홀과 양자역학에서의 비국소성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건 1935년이니, 두 가지 이론이 세상에 나온 건 정말 오래되었다. 1935년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보리스 포돌스키, 나단 로젠과 함께 “물리적인 실체를 양자역학으로 기술하는 것은 완전한가?”라는 도발적인 논문을 출판하였다. 이 논문의 핵심은 오늘날 이 세 명의 저자의 이름 앞 자를 따서 “EPR 역설”로 알려져 있다. 양자역학의 가장 연약한 속살을 칼로 찌르는 듯한 논문이었다.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두 입자가 양자적으로 서로 얽혀있다면, 한쪽의 정보를 아는 순간, 다른 쪽의 정보도 순간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아인슈타인에게는 이 양자얽힘이 상대성이론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이걸 “으스스한 원격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고 불렀다. 훗날 존 스튜어트 벨은 EPR 역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등식을 내놓았다. 작년에 알랭 아스페, 존 클라우저, 안톤 차일링거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근거가, 바로 양자역학은 이 '벨의 부등식'을 위배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인 데 있었다. 이런 점에서 2022년 11월 말에 <네이처>에 출판된 논문은 마치 2022년 노벨물리학상을 축하하는 축포와 같다.

지난해 11월30일 “양자 프로세서에서 통과 가능한 웜홀 동역학” 논문이 발표된 네이처지 표지.
지난해 11월30일 “양자 프로세서에서 통과 가능한 웜홀 동역학” 논문이 발표된 네이처지 표지.

블랙홀

EPR 역설의 논문이 나온 그해에 아인슈타인은 로젠과 함께 또 다른 논문을 출판했다. 겉보기에 이 논문은 EPR 역설의 논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였다. 이 논문에서는 일반상대성 이론이 예측하는 블랙홀의 해를 다뤘다.

1915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블랙홀이 실제로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8세기 말에 존 미첼이라는 영국 철학자와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블랙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실제로 블랙홀이 존재하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나온 그해 12월 말, 아인슈타인은 독일과 러시아가 맞서 싸우는 동부 전선에서부터 날아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는 독일 물리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가 쓴 것이었다. 슈바르츠실트는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독일 육군에 입대하였다. 1915년부터 러시아군과 싸우는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였는데, 그곳에서 수포창에 걸려 건강도 무척 쇠약해졌다. 전쟁도 건강도 그의 학문적인 집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슈바르츠실트가 구한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의 해가 적혀 있었다. 건강이 악화되자, 슈바르츠실트는 제대한 뒤 괴팅겐으로 돌아왔지만, 두 달 남짓 지나 마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구한 해는 처음으로 일반상대성 이론에는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걸 세상에 알렸다.

블랙홀은 태양보다 훨씬 거대한 별이 진화의 끝자락에서 폭발한 후, 남은 부스러기들이 중력에 의해 다시 모이면서 생겨난다. 그 과정이 계속되어 내부 압력마저 이겨낼 정도로 중력이 커지면, 전자가 배타원리를 따라 버티는 힘도 이겨내고, 끝내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버티는 힘도 극복한 후, 압축된 물질이 계속해서 수축한다. 마침내 블랙홀은 빛조차도 도망가지 못할 정도로 밀도가 엄청나게 커진다. 이 별은 빛조차도 가두므로, 빛이 갇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영역을 나누는 경계면을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부른다. 가수 윤하가 부른 <사건의 지평선>에 나오는 가사,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아스라이 하얀 빛”처럼 사라진 별의 자리에 블랙홀이 생겨날 수 있다.

웜홀, 그리고 홀로그래피

1935년, 아인슈타인과 로젠은 일반상대성 이론의 해에서 블랙홀의 외부 영역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존재하고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둘을 연결해주는 것을 두 사람은 '다리'라고 불렀는데, 이 아인슈타인-로젠의 다리가 바로 '웜홀'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과 로젠이 발견한 웜홀은 이걸 통해서는 여행할 수 없는 “통과불가 웜홀”이었다. 이 말은 한쪽 블랙홀의 외부 영역에서 다른 쪽 블랙홀의 외부 영역으로는 갈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기껏해야 두 사람이 각각 웜홀 외부 영역에서 내부 영역으로 뛰어들면 중간에서 만날 수 있지만, 만나는 시간은 지극히 짧을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결국 죽고 말 테니까 말이다.

웜홀의 기하학적 모습
웜홀의 기하학적 모습

그러면 이 웜홀과 양자얽힘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 둘 사이를 관계지으려면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1997년에 이론물리학자 후안 말다세나는 놀라운 이론을 내놓았다. 5차원 중력이론과 4차원 양자장론 사이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걸 추측한 논문이었는데, 이 추측을 '홀로그래피 이중성'(말다세나의 추측)이라고 부른다. 이 논문은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는데, 지금까지 나온 입자물리학 논문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받은 논문이다.

매일 피인용 횟수가 증가하기 때문에 정확히 적기 힘들지만, 이 칼럼을 쓰는 날 기준으로 1만8257회 인용을 받았다. 이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 받은 논문은 스티븐 와인버그가 1967년에 쓴 <렙톤의 모형>이다. 피인용 횟수를 따지면, 이 논문의 누적 피인용 횟수가 1만3800여 회이니, 30년 후에 나온 말다세나의 논문이 와인버그의 논문을 훌쩍 넘어섰다.

홀로그래피라는 말은 광학에서 말하는 홀로그램과 맞닿아 있다. 영화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을 본 사람이라면, 한 솔로의 우주선 밀레니엄 팔콘에서 레아 공주가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처럼 빛의 간섭을 이용해 2차원 영상을 마치 3차원 입체 영상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을 홀로그래피라고 부른다. 말다세나가 추측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4차원 시공간을 5차원에서 보면 마치 5차원의 경계면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마치 3차원에서 사는 우리가 2차원 지표면에서만 움직이는 개미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말다세나는 4차원에서 다루기 몹시 힘든 이론을 5차원의 중력이론으로 대치하면, 문제를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추측했다. 이 이론을 이용하면 계산하기 매우 힘든 강력 이론인 '양자색역학'을 중력이론으로 대체해서 다룰 수 있어서 한동안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이 이론이 새로운 이목을 끈 건 중력이론과 양자얽힘을 홀로그래피 이중성으로 관련지으면서부터였다.

양자컴퓨터와 웜홀

2013년에 말다세나는 유명한 초끈이론 물리학자 레오나드 서스킨드와 함께 1935년 EPR 논문은 아인슈타인과 로젠의 웜홀 논문(ER 논문)을 홀로그래피 이중성을 이용해서 관련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연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EPR=ER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다세나와 서스킨드의 주장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이 두 논문은 모두 1935년에 나왔고 겉보기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홀로그래피 이중성 관점에서 보면, 중력이론에서의 웜홀은 양자 역학적으로 얽혀있는 두 입자 사이의 관계와 같다.

2022년 11월 30일, <네이처 >에 실린 논문에서는 놀랍게도 ER과 EPR 사이의 홀로그래피 이중성을 양자컴퓨터에서 구현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논문의 저자들은 구글에서 개발한 시커모어 양자컴퓨터에서 아홉 개의 큐빗으로 이뤄진 아주 작은 양자 시스템에서 통과 가능한 웜홀을 구현해냈다. 큐빗이 웜홀을 통과한 사실도 놀랍지만, 웜홀의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통과한 큐빗의 신호가 깨지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정 놀라운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얽힘 상태에 있는 두 입자 사이의 정보 전달이 상대성이론을 위배한다고 비판했지만, 실제로는 이 양자적으로 얽혀있는 두 입자 사이의 정보 전달이 상대성이론을 위배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얽힘 상태의 두 입자를 이용해서 빛의 속력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는 장치를 만들 수 없다. 마찬가지로 웜홀을 통해서 정보를 빛보다 더 빨리 전할 수는 없다.

이 논문의 진정한 의미는 1935년에 나온 ER 논문과 EPR 논문을 홀로그래피로 관련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검증했다는 데 있다. 어쩌면 여태 물리학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양자얽힘에 대한 단초를 중력이론이 제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양자역학과 상극인 중력이론이 양자역학의 숨은 비밀을 드러내는 것,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가끔은 상극끼리 통하는 법이다.

애덤 브라운과 레오나드 서스킨드, 네이처 612권, 41페이지 
애덤 브라운과 레오나드 서스킨드, 네이처 612권, 41페이지 

 

※ 필자인 김현철 교수는 현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및 프런티어학부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강력의 탄생> (2021)과 <그렇게 물리학자가 되었다> (2022)가 있다. 30년 넘게 핵물리학과 강입자 물리학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고, 지금까지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190여 편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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